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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Aug 23. 2024

43. 장모라는 여자

팔을 대자로 벌리고 서서 차를 막은 사람은 고윤희였다. 놀란 경비업체 직원이 뛰어나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고윤희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팔을 벌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꽃무늬 원피스 아래 드러난 다리에 툭툭 불거진 푸른색 정맥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혁은 차를 후진시켜 타운 하우스 담벼락에 세웠다. 장 대표는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고 고윤희가 찾아온 사실을 우혁에게 먼저 알렸다. 그가 내려가 해결을 보려고 서둘러 내려왔지만 이미 우혁이 도착한 뒤였다. 우혁과 장 대표는 동시에 고윤희를 마주하고 섰다.


고윤희는 안면이 있는 장 대표와 우혁을 보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경비업체 직원이 두 명 있었고 우혁과 서아, 장 대표와 개를 산책시키러 경비실 옆을 지나가던 타운 하우스 주민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고윤희에게 쏠렸다.


뒤에서 숨어 있던 제인이 무릎을 꿇은 엄마를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엄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엄마가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제인이 울먹이며 고윤희의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세차게 딸의 손을 뿌리쳤다.


“잘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우혁이 짜증 난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전화를 해도 받아주지 않고, 집에는 들어갈 수도 없고 알라메종에서는 거지 취급하니 내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잖아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손톱을 물어뜯으며 새어머니를 바라보던 서아는 마음을 굳히고 문을 열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제인이 뛰어와 손을 잡고 매달렸다.


“언니, 미안해. 우리 엄마 좀 말려줘. 나도 엄마가 저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고윤희는 사람들 시선을 더 끌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서아야, 이 엄마가 잘못했다. 제발 엄마를 용서해 다오. 그래도 너를 키워준 엄마 아니냐.”


고윤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아는 그들 사이로 다가가 우혁에게 물었다.


“저 이분하고 같이 집에 가서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어디 집? 우리 집?”

“아니요. 이분 집요.”

“안 돼. 너 혼자 못 보내. 우리 집으로 가자.”


그 말에 표정이 바뀐 고윤희가 우혁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맞아요. 나 강우혁 씨한테 고맙다는 말도 해야 하고 할 말이 많아요.”


우혁은 징그러운 뱀이나 쥐가 달라붙은 것처럼 식겁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고윤희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손바닥이 거친 아스팔트에 쓸렸다. 고윤희는 과장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동 그

라지는 시늉을 했다. 누가 보면 마치 우혁이 그녀를 발로 걷어찬 것 같은 모양새였다.  


보다 못한 장 대표가 나서서 윤희를 일으켜 세웠다.


“적당히 하고 일어나시지요. 저 차 끌고 오신 것 같은데 차 타고 들어오세요.”


장 대표가 쌀쌀맞은 태도로 고윤희를 잡아끌고 그녀의 차 앞으로 데려갔다.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바람에 무릎이 우툴두툴하게 눌리고 핏기가 조금 보였다. 고윤희는 과장되게 다리를 절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장 대표 지시대로 차에 올라탔다.


“그냥 나 혼자 상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장 대표를 뒤따라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윤희의 차를 보며 서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우혁이 터무니없는 소리 한다며 화를 냈다.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있는데 왜 너 혼자 저 여자를 상대해?”


서아는 양양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음에도 우혁은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 말이 가슴을 뜨끈하게 적셨다. 추운 겨울날 입을 벌리지도 못할 만큼 얼어붙은 몸으로 컵라면을 먹었을 때도 가슴이 이렇게 뜨끈해지지는 않았다. 


장 대표를 따라 우혁의 집으로 들어간 고윤희는 연예인이 사는 고급빌라가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고윤희와 함께 온 제인은 엄마와 달리 민망하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기 앉으시지요.”


장 대표가 소파를 가리키자 염치 따위 없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전에 어떤 프로에서 이 동네 나온 거 봤는데 그 집이 더 잘해놨네. 서아 쟤는 강우혁 씨랑 같이 살면서 인테리어에 신경 좀 쓰지. 집이 이게 뭐야.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얘는 어쩔 수 없다니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고윤희는 장 대표가 레이저가 나갈 것만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자 입을 다물고 자라목이 되었다.


겁에 질린 제인은 계속 ‘엄마 그냥 집에 가면 안 돼?’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고윤희는 그런 제인을 팔꿈치로 치며 너는 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퉁바리를 주었다. 


우혁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서아가 붙잡았다. 


“혹시라도 저 여자가 돈을 요구하면 절대 주지 말아요.”

“안 주면 널 계속 괴롭힐 텐데.”

“괴롭혀도 전혀 상관없어요. 이제 저 여자한테 호락호락하게 굴고 싶지 않아요.”

“진짜? 자신 있어?”


서아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호구 노릇한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는 안 해요.”


우혁이 손가락을 튕기며 싱긋 웃었다.


“좋았어. 저런 여자한테 돈을 주는 것보다는 그 돈으로 다른 곳에 기부를 하는 게 낫겠지.”

“맞아요.”


서아가 자기도 모르게 우혁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싱긋 웃었다. 자신감에 찬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 우혁의 손이 저절로 올라가 서아의 뺨에 가서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둘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순간이었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서자 장 대표와 고윤희, 제인의 시선이 모두 손에 쏠렸다. 우혁은 일부러 그들 보란 듯이 손을 놓지 않고 윤희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이렇게 요란스럽게 찾아오셨습니까?”


고윤희는 비굴하게 웃으면서 주방 쪽을 흘끔거렸다. 


“그래도 내가 예비 장모인데 물 한잔 안주실 모양이지요?”

“장모요?”


우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장 대표는 불쾌하다는 듯 고윤희를 쏘아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서아는 자기가 일어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고윤희를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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