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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Aug 19. 2024

41. 이를 갈고 코를 골아도 예뻐

아침에 눈을 뜬 우혁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 눈을 깜빡였다. 카메라가 사방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자겠다고 눕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잠을 잘 잤다. 건너편 침대에서 모로 누워 자고 있는 서아의 등이 보인다. 제작진은 같은 방을 쓰지만 잠은 따로 잘 수 있는 싱글 침대로 침실을 꾸며 놓았다. 


지난밤 서아는 어색한 얼굴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꼭 이렇게 같은 방에서 자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우혁은 우스갯소리로 부부가 방을 따로 쓰면 애정이 멀어지는 거라고 하자 서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키득거렸다. 


서아는 잠이 안 오는지 자꾸 뒤척이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잠이 안 오느냐고 물으면 ‘아니야 자는 거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누가 먼저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혁이 잠들 때 서아의 숨소리도 고르게 바뀌어 있었다.


우혁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가 서아의 침대로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 매트리스에 턱을 고이고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같은 방에서 싱글 침대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은 사실 우혁의 청이었다. 


구 작가가 침실을 같이 써도 따로 써도 상관없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우혁은 두 사람이 같은 공간을 쓰지만 침대를 같이 쓰지 않아도 되는 형태가 좋겠다고 했다. 구 작가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환영했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감은 눈 위로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었다. 우혁은 손가락을 내밀어 그 머리카락을 올려주려다 멈칫거렸다. 지금 그녀에게 손을 대면 이 시간은 깨지고 말 거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혁이 허공에 들고 있던 손을 다시 내리고 서아를 바라본다.


카메라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이 방에는 오직 그와 서아 단둘이만 있는 거다. 쌔근거리는 서아의 숨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그의 귀를 간질였다. 우혁은 그렇게 서아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눕히고 다시 잠이 들었다. 


따스한 느낌에 눈을 뜬 서아는 바로 옆에 머리를 대고 있는 우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가 움직이자 곧바로 눈을 뜬 우혁이 싱긋 웃으며 서아의 관자놀이에 손을 대며 뺨에 키스했다. 서아는 당황스러웠지만 우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우리 서아 잘 잤나? 일찍 일어났는데 서아 자는 모습 감상하다 다시 잠들어 버렸어.”

“자는 모습 흉할 텐데.”


서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우혁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이를 갈고 코를 골고 눈도 반쯤 뜨고 있더라고. 완전히 납량특집 수준이었어. 거기다 잠꼬대도 하던데.”

“저, 정말?”


우혁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장난이었음을 깨달은 서아가 베개를 집어 들고 우혁의 등을 때렸다.


“나빠, 나쁜 사람!”


분이 풀리지 않은 서아가 서너 차례 우혁의 등을 베개로 쳤다. 그러자 우혁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서아를 침대에 넘어뜨리고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불은 발밑으로 밀려 내려가고 체크무늬 잠옷을 입은 서아가 우혁의 

몸 아래 눕고 말았다. 잠옷 맨 윗단추가 풀어져 가슴골 언저리가 드러났고 쇄골 위로 뽀얀 목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아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가슴 부위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우혁은 엉겁결에 그녀의 팔을 내리누른 터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라 그냥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 


“서아 너는 이를 갈고, 코를 골아도 예뻐.”


서아의 눈에 너울이 일었다. 우혁은 서아가 움직이지 못하게 팔목을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서아는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답이 없는 시험 문제지를 받아 든 것 것처럼 난감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해답을 듣고 싶지만 답을 찾아내는 건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너무 어려웠다.     



   



이번 촬영분은 우혁과 서아가 강릉에서 커피를 보내주시는 팬을 만나 카페 운영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까지였다. 전통 방식으로 커피를 볶아 내리는 김택수 사장은 우혁이 장사를 시작하면 커피는 무조건 자신이 대주겠다며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우혁의 커피 내리는 솜씨를 본 김택수 사장은 이만하면 얼마든지 돈 받고 커피를 팔아도 충분한 수준이라고 인정했다. 


바닷가 집으로 돌아온 우혁은 오늘 커피 공부는 이만하면 됐으니 바닷가 산책을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 프로그램이 카페 운영 프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결혼 예행연습이라는 콘셉트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장사는 낭만적으로 보일 만큼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두 사람이 같이 즐겨야 한다. 서아는 그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판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자들은 두 사람이 장사하느라 서로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는 현실을 원하는 게 아닐 테니까 말이다. 


피서 철이 지난 바닷가에는 데이트하는 젊은 연인들과 커다란 리트리버를 데리고 나온 백인 가족이 눈에 뜨였다. 우혁이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걷기만 하는 우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서아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장아장 걷는 노란 머리의 아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 아기가 혼자 걷는 게 못 미더운 리트리버가 곁을 지키며 따라왔다. 아기가 모래사장이 넘어지자 엄마보다 리트리버가 먼저 달려와 아기의 머리에 코를 댔다. 우혁이 재빨리 다가가 모래에 엎어진 아기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모래 묻은 팔을 흔들며 우우 소리를 냈다. 리트리버가 아기를 안은 우혁이 못마땅한지 컹컹거리고 짖었다. 그때 아기 엄마가 팔을 벌리고 허겁지겁 달려와 아기를 받아안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아기랑 개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한국인 엄마는 아기를 안고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리트리버 줄을 바투 잡고 돌아갔다.


“얘기 팔이 너무 포동 포동 해서 나도 안아보고 싶었는데.”


서아가 아기와 리트리버를 데리고 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애기 좋아해?”

“글쎄요.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오빠가 아기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아기 안은 모습이 잘 어울렸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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