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예진 Aug 16. 2024

40. 살고 싶은 집

“우혁 씨는 결혼해서 살고 싶은 집이 있었어요?”

“또, 또, 또.”


서아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톡톡 치며 웃었다. 


“오빠느은…… 결혼해서 살고 싶은 집이 있었어요?”


오빠라는 말에 콧소리가 섞이자 우혁이 목덜미에 손을 대며 민망한 듯 웃었다. 


“당연히 있지.”

“어떤 집인데요?”

“지금 우리가 가는 집이 내가 꿈꾸던 바로 그런 집이야.”

“와, 진짜요?”


서아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차가 양양으로 들어서자 멀리서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혁이 차를 댄 곳은 바닷가를 마주하고 있는 작은 카페였다.


“카페?”

“내가 그랬잖아. 은퇴하면 바닷가에서 작은 커피집을 하고 싶다고. 카페 안쪽에 살림집이 있어.”


서아가 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카페로 다가갔다. 우혁은 둥그런 손잡이를 잡고 닫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테이블이 다섯 개쯤 있는 작고 소박한 카페였다. 마른 꽃이 창가에 매달려 있고 북유럽 감성의 타일 장식이 눈에 뜨였다.


“자, 그럼 우리 신혼집도 구경해야지.”


우혁이 갑자기 서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서아가 비명을 지르며 우혁의 목덜미를 꽉 껴안았다. 우혁은 카메라가 잘 보이는 쪽으로 돌아 서아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뽀뽀였다. 


귀여운 강아지나 아기에게 하는 뽀뽀, 키스가 아니라 입술의 감촉만 살짝 느낄 수 있는 뽀뽀였다. 하지만 아무리 뽀뽀라도 우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는 건 사실이다. 서아는 멍한 표정으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처음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나.”


우혁이 서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서아는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서아가 그렇게 엉거주춤 우혁의 목을 껴안고 있는 사이 그는 카페와 이어진 살림집 문을 발로 밀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푸른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옅은 색의 원목으로 꾸며진 방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흰색 침구가 정돈되어 있고 얇은 커튼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혁은 서아를 침대에 내려놓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는 커피를 내리고 서아 너는 케이크를 만들어 팔자. 장사가 끝나면 파도 소리 들으며 산책하고 휴일에는 이 창문을 열어 놓은 채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어. 어때 나랑 같이 해줄래?”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우혁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언제까지나.”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피디가 잠시 쉬었다 간다며 손뼉을 쳤다. 서아는 슬그머니 팔을 풀며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우혁의 화장을 고치고 머리 모양을 정돈했다. 


서아는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 갑자기 어수선해진 집안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좀 전에 우혁의 목을 껴안았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을 고치고 있는 우혁을 보는 게 낯설었다.


‘저 사람은 모두 연기였는데 나만 혼자 주책없이 감동했잖아.’


민망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혁은 스타일리스트에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덥다며 갈아입을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바람 좀 쏘이고 올래요?”


장 대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물었다. 서아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혼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움츠러들었던 등을 펴며 턱을 끄덕였다. 밖으로 나가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장 대표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더니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을 재빠르게 찾아내 그녀를 데리고 갔다.


“적응이 잘 안 되지요?”


서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게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도 아니라 뭔가 되게 혼란스럽네요.”


“그럴 거예요. 그런 마음 너무 감추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드러내요. 그래도 돼요. 계속 찍어서 편집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면 돼요.”


“내가 만약 우혁 씨 진짜 여자 친구라면 또 이야기가 다를 텐데…….”

“하긴 그것 때문에 더 복잡하기는 하지요?”

“많이요.”

“처음이라 그럴 거예요. 차츰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서아가 웃으면서 장 대표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장 대표는 갑작스러운 서아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다행이에요. 장 대표님이 있어서.”

“이게 내 일인데요 뭐.”

“우혁 오빠는 좋겠어요. 이런 친구가 있어서.”


서아는 자신이 우혁 오빠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서아 씨도 나랑 친구 해요.”

“하아, 그래도 될까요?”


서아가 가로수길에서 우혁에게 받은 분홍색 수국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민석은 그런 서아의 얼굴을 보는 게 편치 않아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요. 당연히 되지요.”

“어쩐지 든든해지는데요. 나한테도 장 대표님 같은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게 없어지는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이 해결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나 같은 친구 있으면 든든한 거 하나는 확실해요.”

“정말 그러네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저녁 해가 산등성이에 걸려서 뉘엿거렸다. 감미로운 저녁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입추가 지난 바다는 너무 덥지도 그렇다고 서늘하지도 않아서 밤새 이렇게 테라스에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머리 손질을 마친 우혁이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혁은 한 손으로 장 대표의 목덜미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서아의 어깨를 잡았다.


“두 사람 나만 빼놓고 뭐가 그리 재미있나?”


서아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우혁 오빠만 오빠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민석 오빠도 오빠다 뭐 이런 얘기?”


민석은 서아의 민석 오빠라는 말에 흠칫해서 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아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뭐? 민석 오빠? 야, 너는 나한테 오빠라는 말을 하느라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어떻게 민석 오빠라는 말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와?”


“왜 그래요? 채영 씨도 우혁 오빠, 민석 오빠 하던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야, 너 진짜…….”


두 사람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 그렇게 테라스에서 한참을 티격태격하며 말싸움을 했다.          

이전 09화 39. 진짜같은 가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