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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Aug 21. 2024

42. 12시를 넘긴 신데렐라

서아가 피식 웃었다. 우혁은 자연스럽게 서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팔로 감싸 안았다. 


“널 만나면서 내가 너무 착해지는 것 같아. 나도 내가 저런 아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아기를 안는 순간 뭔가 뭉클하더라고.”


서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우혁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말이 너무 진심 같아서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서아는 제발 카메라가 자신의 눈을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박 이일의 촬영이 끝나고 제작진은 모두 양양을 떠났다. 우혁의 스텝들은 장 대표와 같이 떠나고 두 사람만 집에 남았다. 특별한 일정이 있어서 남은 것은 아니었다. 


구 작가가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은데 이렇게 촬영을 마무리하는 게 너무 아깝다며 계속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우혁이 농담으로 카메라 주고 가면 우리 둘이 여기서 조금 더 찍고 갈 수 있는데라고 말했다. 우혁은 장난이었지만 구 작가는 그 장난을 냉큼 받아 챙겼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카페 문을 열고 테라스에 앉아 파도가 일렁이는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카메라를 옆에 세워둔 채 그렇게 한참을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 한가한 느낌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우혁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해안가를 날고 있는 새를 바라보았다. 


“일이 없으면 불안해서, 일이 있으면 바빠서 마음을 내려놓고 지낼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어. 외국에라도 나가 있으면 좀 덜한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더라고.”


서아가 일어나 카페 안에서 자두 에이드를 만들었다. 김택수 사장이 이건 팔게 아니라 두 사람만 먹으라며 준 자두청이었다. 김천에서 유명한 자두로 만들었다는 청에서 달콤한 여름 냄새가 났다. 자두청에 탄산수와 얼음을 넣고 젖자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창가에 심어놓은 허브 화분에서 타임 잎을 하나 따서 얹고 우혁 앞에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때맞춰 불어온 바람에 타임 잎이 빙그르 돌았다. 서아는 옆에 놔둔 카메라를 들고 자두 에이드를 가까이서 찍었다. 


“촬영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방송이 아니었으면 이런 순간을 만들지 못했을 것 같아요.”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정말 이렇게 너랑 둘이 조그만 카페 하면서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서아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렇게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스텝들은 모두 철수했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다. 그러니까 우혁은 지금도 방송 모드일 것이다. 당연히 방송 모드가 맞다.


“나중에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의 분위기와 감정이 그리울 것 같아요.”

“나는 아닌데.”


우혁이 짓궂은 얼굴로 대답했다. 서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할 수 없고요. 그냥 나만의 추억으로 삼아야지요.”

“나는 네가 말하는 그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거든.”


뭔가 알 수 없는 섭섭한 감정에 서아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네에. 그러세요? 우혁 오빠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나는 텔레비전으로 노려보고 있을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당연히 너랑 같이 행복할 거지. 지금 시작이니 앞으로 둘이 같이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지.”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젖히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데 웃음이 웃음을 불러왔다. 그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혁이 카메라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우혁은 화면에 비친 서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웃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었다.

배가 고파진 두 사람은 카메라를 꺼버리고 손을 잡은 채 어슬렁어슬렁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물회집을 발견한 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맞이한 식당 주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달려와 사인을 청했다.


우혁의 사인을 받는 건 당연했지만 서아한테까지 사인을 청하는 바람에 당황한 서아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사진까지 찍어주고 나서야 해방된 두 사람은 신선한 오징어에 멍게, 해삼, 전복이 든 물회의 얼음육수를 들이켜고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 모두 카메라를 껐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도 어색하지 않았고 식당 주인이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촬영장인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내려 마시고 차에 올라탔다. 다음 촬영은 일주일 뒤에 있을 계획이다. 


우혁이 시동을 걸고 서아가 하얀 벽돌집과 카페를 돌아보자 그제야 촬영이 끝났다는 게 실감 났다. 신데렐라가 열두시를 넘긴 기분이었다. 시계가 열두시를 알리자 화려했던 드레스는 재투성이 옷으로 바뀌고 아름다운 마차는 호박으로, 멋진 마부는 생쥐로 바뀌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이제 사랑하는 사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양양을 벗어나면서 조금, 고속도를 지나면서 조금 더, 그리고 서울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우혁도 서아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몫으로 감당해야 할 혼란이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서울의 거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서아에게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서아가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혁의 핸드폰이 드르륵 거리며 진동했다. 


전화를 받은 우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서아를 흘깃 보더니 알았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서아는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혁이 얼굴을 펴지 않는 게 신경 쓰여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타운 하우스 앞에 도착해서야 우혁이 왜 그렇게 얼굴을 찌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차가 타운하우스 경비초소 앞에 서자 웬 사람이 뛰어들어 차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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