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시작은 알라메종에서 이루어졌다. 연출진은 서아가 알라메종에서 얼그레이 초콜릿 무스를 만드는 모습부터 찍었다. 김 사장은 입이 광대에 걸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알라메종은 이미 가로수길 천사가 디저트를 만드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웨이팅이 기본 한 시간이었다.
김 사장은 서아가 촬영 때문에 근무를 제대로 할 수 없으면 없는 대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와서 알라메종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인식만 시켜달라고 사정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서아의 인지도로 판매가 올라간 부분의 십 퍼센트를 주겠다고 했다.
서아가 그 부분에 대해 민석에게 상의하자 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은 계약이라고 했다. 다만 서아의 인지도가 오르기 전의 매출에 대해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 자신이 나서서 확인을 해주겠다고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서아는 그나마 가족이라고 이복동생 제인의 마음에 의지해 살았다. 그런데 이제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 시작이 아빠의 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우혁이 구 작가에게 했던 ‘은 피디님이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줬다’는 말은 방송용 멘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서아는 그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서아도 아빠가 두 사람이 만나기를 원하셨던 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우혁이 입 밖으로 꺼내자 그게 방송용이든 아니든 진실처럼 느껴졌다. 말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였다.
카메라는 서아가 알라메종에서 퇴근하고 나오는 길을 따라갔다. 이후에 어떤 식으로 촬영할지 서아는 알 필요가 없다고 구 작가는 말했다. 조심스럽게 길을 나서자 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우혁이 화사한 수국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이 터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서아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부끄러운 듯 우혁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셔츠에 짙은 감색 슬랙스를 입은 우혁이 소담한 분홍색 수국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팔을 걷어 길쭉한 팔목을 드러내고 단정한 시계를 찬 그의 모습은 서아의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보고 있는데, 카메라가 사방에서 그들을 비추고 있는데 어떻게 저 사람만 보일 수 있지? 서아는 이런 게 바로 스타의 힘인가 싶어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이 아침을 먹고 우혁이 먼저 장 대표와 헤어숍으로 출발했다. 구 작가는 최대한 감정선을 살리기 위해 두 사람이 다른 숍을 이용하기 원했다. 그래서 서아는 임 팀장과 같이 움직였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서아의 마음은 제작진이 의도하는 대로 데이트를 시작하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뭔가 이상했다. 우혁과 서아의 연애는 그녀가 JK401에서 키우는 신인 연기자라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시작한 가짜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건 방송을 위한 가짜 데이트인데 마음은 진짜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 뒤죽박죽 엉켜서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우혁과 점점 가까워지자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그냥 마음이 향하는 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드디어 우혁과 마주 섰다. 우혁은 말 대신 환한 웃음으로 서아를 맞으며 수국 꽃다발을 건넸다. 꽃다발을 받아든 서아가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었다.
“우혁 씨.”
우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가로수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 우혁 씨냐?”
“아, 이제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지.”
서아가 놀란 듯 꽃다발로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말 배우는 아기처럼 연습해야 할 것 같다. 따라 해 봐. 오빠. 우혁 오빠!”
서아는 수국으로 빨개진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키득거렸다. 우혁은 수줍어 움츠러든 여자의 옷깃을 풀어 내리
듯 꽃다발을 밀어냈다.
“해봐.”
나긋한 우혁의 목소리에 서아가 시선을 떨어트리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 우혁 오빠!”
“거봐 잘 하잖아.”
우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구 작가는 카메라 앞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카메라 때문에 긴장돼서 혼났어요. 역시 우혁 아니 오빠는 프로네요.”
우혁이 피식 웃으며 서아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차 안에서도 촬영 중은 마찬가지인데.”
그제야 서아는 차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확인하고 아차 싶은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러네. 리얼리티 예능에서 많이 봤으면서도 우리 둘만 있으니까 갑자기 해방된 기분이 들었어요.”
“자 이제 결혼 생활을 미리 체험할 우리 집으로 가볼까!”
서아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 집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우혁은 알려주지 않았다. 촬영 시작하기 전부터 우혁은 알고 있었지만 서아는 모르게 해달라는 제작진의 부탁이 있었다. 서아에게서 리액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 접어들자 서아가 짐작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바닷가 집인가 본데요?”
“너는 결혼하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었어?”
“글쎄요……. 아직 결혼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특별하게 꿈꾸던 건 없는데.”
서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이라는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서아가 새어머니와 살던 집, 그리고 지금 우혁과 사는 집을 떠올렸다. 어떤 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서아가 고개를 돌려 우혁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