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박이 된장찌개에 밥새우 계란찜, 토마토 샐러드, 마늘 견과 볶음에 열무김치를 곁들여 아침상을 차렸다. 우혁은 밥을 발우 공양하듯 깨끗하게 먹더니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서아가 왜 이러시냐고 말렸지만 힘으로 밀쳐내는 우혁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너는 식탁에 앉아서 설거지하는 나를 위해 재미난 이야기나 좀 해봐. 요즘은 그 오뚝이같이 생긴 사장이 안 괴롭혀?”
“말도 마요. 알라메종 입구에 내 사진이 들어있는 현수막을 걸겠다고 해서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내가 그러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하는 수없이 사진을 빼고 만들었어요.”
“그 사장은 왜 그렇게 아재스럽냐. 알라메종 꾸며놓은 거 보면 꽤 세련됐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알라메종을 전체적으로 컨설팅한 건 사장이 아니라 제과 팀장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팀장이랑 사장이 좀 수상하기는 한데…….”
“사장이 유부남 아니야?”
“그러니 탈이지. 남들은 다 눈치챘는데 두 사람은 자기들이 감쪽같이 비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우혁이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 그라인더를 꺼냈다. 강릉에서 카페를 하는 팬이 보내준 커피는 유난히 깊은 맛이 나고 고소하다. 커피를 갈기만 했는데 주방 가득 진한 향이 퍼진다.
서아가 턱을 고이고 앉아 우혁이 드립포트를 기울여 커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혁 씨는 드립포트를 들고 있을 때가 가장 진지한 것 같아요. 음, 마치 붓글씨를 쓰는 것처럼 보여요.”
“맞아. 나는 커피를 내릴 때 몰입하는 기분이 되게 좋아. 그래서 나중에 인기 없어지면 남해 바닷가 어디쯤에 가서 아주 작은 커피집을 하고 싶어.”
“우와 좋겠다. 그럼 나는 그 커피에 맞는 디저트를 만드는 건가?”
서아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꿈꾸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곧 자기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혁이 서아 앞에 커피잔을 내밀었다. 우혁은 커피 애호가인 만큼 커피를 담는 찻잔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데 오늘의 찻잔은 로얄코펜하겐의 블루 풀 레이스 커피잔이다. 푸른빛 도는 레이스가 찰랑이는 커피를 더욱 품격 있게 만들어준다.
“서아야.”
서아가 아랫입술을 물며 무슨 일이냐는 듯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턱에 엄지를 대 입술을 끌어내렸다.
“내가 이번에 예능 프로 섭외를 받았는데. 그게 우리가 같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예능이야.”
“네에? 저보고 텔레비전에 출연하라고요?”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혁 씨는 하고 싶으니까 저한테 묻는 거겠죠?”
서아의 질문에 우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우혁은 자기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고 있었다. 난처해하는 우혁이 재미있는지 서아가 생글거리고 웃었다.
“그럼 나도 출연료 받는 거예요?”
“출연료? 당연하지. 내 출연료까지 네가 다 가져.”
“됐네요. 나도 내 출연료가 있는데 왜 우혁 씨 것까지 챙겨요. 내가 무슨 앵벌이 하나.”
“그럼 출연하기로 하는 거야?”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집에 머무르겠다고 선택한 이상 그런 일들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할게. 나는 너를 억지로 이 세계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
“이미 들어가도 한참 들어갔어요.”
“그런가?”
우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채영이 들쑤셔놓은 마당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마당에 잔디를 새로 심고 원목 파고라 대신 스틸 패널로 지붕을 올린 가제보를 설치했다. 대문도 색을 바꾸고 벽도 손을 보자 마당 분위기가 새로워졌다.
공사가 끝난 상황을 점검하러 나갔던 민석이 땀에 젖은 얼굴로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민석을 본 우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가 허락했어.”
민석은 그런 우혁과 서아를 보며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실망하는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담당 작가와의 첫 미팅은 논현동에 위치한 JK401 사무실에서 하기로 했다. 처음 JK401을 방문한 서아는 턱을 치켜들고 십이 층 건물 꼭대기에 붙어 있는 기획사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이 노후돼서 곧 리모델링 예정이야. 내가 결정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이 일인 기획사를 차리면서 건물을 매입한 거지.”
우혁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뿌듯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보았다. 부동산에 개념이 없는 서아는 우혁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면 점심 먹을 곳은 많겠네요.”
“너는 이 건물을 보면서 고작 그런 생각밖에 안 드니?”
“그럼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건물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궁금해하거든.”
“칫, 다른 건물도 다 올랐어요. 팔고 이사 가려면 그만큼 돈이 더 필요할 텐데 오른 게 뭐 대수라고.”
우혁은 얼굴이 벌게져서 서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저거 아무것도 모르는 거 마냥 순진하게 구는데 이럴 때 보면 진실을 너무 잘 안 단 말이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뒤에서 우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혁 오빠!”
서아와 우혁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커트머리에 자수 블라우스를 입고 에스닉한 실 팔찌를 두른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심한 듯 차려입은 모습이 세련돼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털털하게 보이는 호감형이었다.
“어? 선아? 네가 이번 프로 작가야?”
“오빠가 캐스팅되고 나서 작가 하나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급하게 수혈됐어. 당분간 일 안 하고 책만 쓰려고 했는데 왕언니가 하도 사정을 해서 엉겁결에 끌려 나왔네.”
작가는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두 분을 담당하게 될 작가 구선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은서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