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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Aug 05. 2024

35. you raise me up

“하지 마라.” 


서아의 콧소리에 우혁이 손으로 팔뚝을 문지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런 우혁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서아는 빙수를 먹는 내내 우혁을 오빠라고 불렀다. 노랗게 반짝이는 애플망고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눈을 살그머니 감았다. 달콤한 맛이 혀에 닿아 부드럽게 녹아내리는데 영혼까지 녹는 것만 같았다.


“와, 맛있다. 망고 상태가 기가 막혀요. 너무 익어서 무르기 직전의 달콤함이 최고인 망고네요.”


우혁은 서아를 따라서 망고를 한입 먹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에스 호텔 빙수가 더 맛있는 거 같은데.”

“거기 빙수가 정말 십만 원을 주고 먹을 만큼 맛있어요?”

“먹어 보고 네가 판단해.”


서아는 우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에스 호텔 망고 빙수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판단을 하냐며 투덜댔다.  


빙수를 먹고 차에 탄 우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서아가 내비게이션 화면을 흘끔거리며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물었다.


“데이트한다고 했잖아. 데이트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도착하면 여덟시 좀 넘을 테니 딱 맞겠는데.”


서아는 예술의 전당에 도착하고도 우혁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차창 밖을 기웃거렸다. 그런 서아를 보면서 우혁은 그녀가 나이 스물다섯 먹도록 뭘 하고 산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도 가지 못하고 새엄마와 이복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디저트 만드는 일과 집밖에 모르는 모양이었다. 남자 친구 한 번 사귀지 못하고 꽃 같은 이십 대 초반을 제과실에 파묻혀 지낸 게 틀림없었다. 


“너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밖에 안 하고 살았지?”


우혁의 말에 서아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어트렸다. 


“내가 좀 멍청해 보이기는 하지요? 전에는 몰랐는데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요.”

“그런 뜻으로 묻는 게 아니잖아.”


어둠이 내린 예술의 전당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한여름 밤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비릿한 물냄새와 풀냄새가 섞여났다. 그때 갑자기 맑고 청아한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아는 그제야 우혁이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잠잠했던 분수대에 물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노래는 유 레이즈 미 업 (you raise me up)이었다. 화려한 조명을 받은 분수가 음악에 맞추어 출렁이고 물을 뿜고 리듬을 탔다. 


“예쁘다.”


서아가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아침 일곱에 출근해 저녁 일곱 시까지 사방이 꽉 막힌 제과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월요일 하루 쉬는 날은 집에서 밀린 청소와 반찬을 만들어 놓느라 쉴 틈이 없었다. 


왜 그러고 살았느냐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줄 알아서? 아빠의 부탁 때문에? 그도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새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아마도 모두가 정답 일 것이다. 


우혁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잔디에 펼쳐놓고 서아의 어깨를 쳤다. 


“앉아. 여기 앉아서 봐.”

“이걸 깔고 앉으라고요?”

“응.”

“에이 내 바지가 이 셔츠보다 훨씬 싸구려인데 바지를 아끼려고 셔츠를 깔아요?”


서아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혁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아끼려는 건 바지가 아니라 너다. 깔고 앉아라.”


서아는 우혁의 말이 너무 민망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셔츠를 깔고 앉을 수도 없어서 그냥 선채 분수 쇼를 바라보았다. 십분쯤 지나자 앉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잔디밭에 편하게 앉아 보는데 혼자만 서서 있기도 좀 민망했다.  


서아가 살짝 다리를 구부리자 우혁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서아가 흠칫 놀라 우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아를 자신의 셔츠 위에 앉혔다. 서아는 우혁의 악력에 눌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하게 바뀌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분수 쇼를 보기만 했다. 귀에 익은 팝송들이 연달아 나오자 서아가 조그맣게 따라 부르며 흥얼거렸다. 어두워서 그런지 그들을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아가 우혁의 귀에 손을 대고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속삭였다. 그러자 우혁이 서아의 귀에 대고 알아도 모르는 척해주는 거라고 말했다. 서아는 정말 그럴까 싶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러다 공연히 관심을 끌 것 같아 시선을 분수에 고정시켰다. 


귓속말을 하느라 몸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의 허벅지가 맞닿아 있었다. 우혁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은 곳이 불길에 닿은 듯 후끈거렸다. 신경은 어느새 모두 그곳으로 쏠려 분수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를 움직이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우혁을 자극할 것만 조심스러웠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바닥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서아는 손바닥을 청바지 위에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우혁의 팔이 서아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이 서아의 어깨를 잡더니 자기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놀란 서아가 눈

을 동그랗게 뜨고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서아의 눈을 보더니 쉿 소리를 냈다.


서아의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우혁이 왜 서아를 끌어 당겼는 지 알 수 있었다. 손가락만 한 커다란 벌이 서아의 어깨 옆에서 윙윙거렸다. 서아는 겁에 질려 우혁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으, 어떻게 해. 날아갔어요?”


우혁은 대답하지 않고 서아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우혁의 품에서는 그의 방에서 나는 블랙베리 향수 냄새가 났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았던 우혁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아갔어.”


서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우혁의 품을 벗어났다. 벌이 옆자리로 갔는지 누워있던 여자아이가 꽥 비명을 질렀다. 음악이 그치고 분수가 멎자 자리에서 일어서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일어서려는 서아의 팔을 우혁이 잡았다.


“사람들 빠지고 나서 나가자. 지금 나가면 복잡해.”


서아는 손바닥으로 잔디를 쓸며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끝이 뾰족한 잔디에 닿은 손바닥이 그녀의 심장만큼이나 간질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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