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해야지. 그러잖아도 피곤한 너를 사람들 속으로 끌고 다니면 되겠니.”
우혁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가게 문을 밀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주인 송중호가 호들갑스럽게 우혁을 맞이했다.
“자기 왔구나.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보고 싶어서 눈 빠지는 줄 알았잖아.”
간드러진 목소리로 야단맞게 인사를 하던 송중호가 서아를 보더니 입을 가렸다.
“맞다. 바로 그 가로수길 천사? 대박.”
송중호는 서아를 와락 껴안으며 반갑다고 진짜 천사라며 어쩔 줄을 몰랐다.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송중호의 호들갑을 보고 있던 우혁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 완전 대박이다. 어떻게 가로수길 천사를 사귀게 된 거야. 나 가로수길 천사 팬카페 열매 회원이잖아. 다른 팬카페는 다 엉터리야. 진짜는 우리 서아 사랑 가로수길 천사뿐이야.”
“아, 네 감사합니다.”
송중호는 계속 서아를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우혁의 눈초리에 기가 죽었다.
“오늘 두 사람을 위해서 내가 쏜다. 우리 특별한 손님은 핑크 룸으로 들어가자.”
핑크 룸은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제일 근사한 뷰를 가진 룸이었다.
“우아, 여긴 룸이 굉장히 좋네요.”
서아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자 우혁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 풍경이 훨씬 예쁘니까 네가 여기 앉아라.”
서아는 고개를 돌려 우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건물로 막혀 있었지만 우혁이 가리키는 쪽은 트여서 이국적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밖을 내다보는 사이 우혁은 이미 그녀 자리로 건너와 있었다. 서아는 아무 말하지 않고 우혁이 시키는 대로 그가 앉았던 자리로 옮겼다. 별일 아닌데 이런 작은 일들이 공연히 서아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능소화 꽃그늘 아래 입맞춤도, 우혁이 그녀를 가슴에 안았던 일에 대해서도 두 사람 모두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정말 없었던 일처럼 여겨졌다.
서아는 가끔 거울 앞에서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며 그날 밤 일을 떠올린다. 우혁의 입술이 닿았던 그 짧은 순간의 느낌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당황한 우혁을 보고 퉁치겠다며 입술을 들이민 자신의 행동은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았다.
내가 미치지 않고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아를 바라보고 있는 우혁의 눈빛에서 가끔 그날 밤의 흔적이 보인다. 정말 꿈이 아니었던 걸까?
상념에 잠겨있던 서아를 깨운 것은 송중호가 내놓은 메뉴판이었다. 우혁은 서아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먹던 걸로’ 주문했다.
“왜 나한테 안 물어봐요?”
서아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말했다.
“네가 보면 알아?”
“내 나이가 몇인데 고등학생 취급해요? 당연히 알겠거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혁이 대답을 하지 않자 머쓱해진 서아가 말했다.
“물론 모르기는 하죠.”
“너의 그 모름을 나는 아니까.”
“칫. 그런데 여기 어떤 여자랑 왔어요?”
우혁이 우습다는 듯 턱을 고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궁금해?”
“뭐 특별히 궁금하다기보다는 남들은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아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으래?”
우혁이 과장된 어투로 반응했다. 서아는 괜히 말을 꺼냈다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볼만 화끈거렸는데 곧 귀까지 빨개졌다.
“오빠라고 부르면 말해주지.”
“필요 없어요. 하나도 안 궁금해요.”
“그럼 됐고.”
두 사람은 딴전을 피우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서아가 슬쩍 우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오빠라는 말을 좋아해요?”
“누가? 어떤 놈이 너한테 그렇게 오빠라고 불러 달랬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남들을 보면…….”
“난, 오빠라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좀 지겨워. 뭐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도 잘생기면 오빠라나 뭐라나.”
먼저 나온 음료를 마시던 서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겨? 내가 잘 생긴 게 웃겨?”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계속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곤란을 겪던 서아를 구해준 것은 음식이었다. 튀김요리인 토트먼꿍, 여름용 냉라멘, 차슈 돈부리 등이 나왔다. 우혁은 토트먼꿍을 서아의 앞 접시에 놔주며 이건 새우 살로 만든 태국식 튀김요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부드럽게 으깨지면서도 바삭한 튀김은 맛있었다. 서아는 우혁의 설명을 들어가며 이국적인 요리들을 정신없이 먹었다. 매콤하면서 차가운 냉라멘도 입에 착착 붙었고 달착지근한 돼지고기인 차슈 돈부리는 씹기도 전에 넘어갔다.
우혁은 먹기보다 서아가 먹는 걸 보는 게 더 즐거운 모양이었다. 자주 젓가락을 놓고 서아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정신없이 먹던 서아가 문득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웃었다.
“왜 안 먹고 보기만 해요?”
“너 먹는 거 보니까 앞으로 내 생각만 하지 말고 너랑 같이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으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 밥 사 먹기 싫어서 저 고용한 거잖아요.”
“아닌데.”
“네?”
매콤한 라멘 국물을 마시고 코에 땀이 송송 난 서아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우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뭐 하러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나를?”
“너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
우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아는 자신의 심장이 내는 쿵쿵 소리가 우혁에게까지 들릴까 봐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렇겠지요. 처음에 우혁 씨 냉장고를 살펴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정리가 잘 돼 있어서 보통 솜씨가 아니구나 싶었거든요. 그런 분을 내 보내고 나한테 밥을 하라고 하다니 가사도우미는 그냥 명분에 불과한 거겠지 싶었어요.”
“가끔은 그렇게 시치미를 뗄 필요가 있기도 하지.”
“그럼 계속 시치미를 떼지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서아의 질문에 우혁이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 사이 송중호가 들어와 음식을 빼고 망고 빙수를 내려놓았다.
“어, 우리 이거 안 시켰는데?”
“어머, 자기 왜 이래? 여름마다 망고 빙수 먹으러 왔으면서. 내가 자기 취향 정도는 꿰고 있어야지.”
송중호는 우혁에게 잔뜩 교태를 부리더니 서아를 돌아보고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천사님, 우리 빙수가 그 유명한 호텔 망고 빙수보다 더 맛있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는 제주도에서 직송한 애플망고에 내가 직접 조린 국산 팥을 써요.”
“아, 네에.”
서아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송중호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효, 걱정하지 마요. 내가 우혁 씨 꼬실까 봐 겁나는구나. 으응, 임자 있는 남자 넘보는 나쁜 사람 아니야.”
호들갑스러운 송중호가 나가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아는 턱을 고이고 우혁을 향해 콧소리를 냈다.
“오빠, 여기서 망고 빙수 누구랑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