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라.”
짤막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서아는 자기가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아 어깨를 떨어트리고 돌아섰다. 괜히 코끝이 싸해지고 서러웠다. 우혁이 나서서 윤채영에게 화를 내거나 그따위 말을 하는 게 어디 있냐고 편을 들어주기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마디로 잘라 말하는 우혁에게 섭섭했다. 고개를 숙인 채 코를 훌쩍거리며 들어가는 서아의 팔을 누군가 낚아챘다. 고개를 들자 민석이 재빨리 그녀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구경하고 있어요. 이 동네가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지만 지금은 워낙 재미난 구경거리가 났으니 다들 못 본체 할 수 없을 거예요.”
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알아요.”
“아는 것과 마음은 다르다는 게 문제지요?”
서아는 콧물이 흘러나오는 게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콧물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면 그녀가 울고 있다고 여길게 틀림없다. 안 우는 건데 그냥 콧물만 나오는 건데 누구도 그걸 믿어주지 않을 거다.
서아가 발끝에서 시선을 들지 않고 화장실을 향해 종종걸음을 걸었다. 서아는 민석이 아직도 자기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고 걸었다. 민석의 손아귀에서 서아의 손목이 풀려나갔지만 민석은 팔을 내리지 못하고 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밖에서 윤채영의 내 술 내놓으라는 고함이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석이 서둘러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우혁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채영을 재빨리 다시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 안에서는 독한 위스키 냄새가 진동했다.
차를 후진시키자 튀어나온 전조등이 바닥에 끌리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민석은 집 밖으로 차를 끌어내자마자 채영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매니저는 비명을 지르며 알았다고 당장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만 윤채영 옆에 있어달라고 사정했다.
“강우혁, 나쁜 새끼!”
민석이 입을 꽉 다문 채 차를 몰아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채영의 집 주차장을 향했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자 채영이 갑자기 민석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야, 장민석 너 지금 나 비웃지? 그렇지?”
“채영아, 제발…….”
순간 채영이 민석의 얼굴을 향해 폭포 같은 구토를 시작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토사물이 목덜미며 앞자락에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석은 계속해서 토하고 있는 채영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 모든 진상 짓은 죄다 모아 종합선물세트로 포장한 것만 같았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비볐다. 수건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흰자위가 장 대표의 눈처럼 빨갛게 된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운 것도 아닌데, 눈물을 참았을 뿐인데 눈이 충혈된 게 억울했다.
똑 똑 똑
서아는 문을 열고 나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억지로 웃었다.
“채영 씨는요?”
“민석이가 데리고 갔어.”
우혁이 서아의 눈치를 살피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시선을 피하며 거실 창으로 나가 엉망이 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파고라의 나무 기둥은 부러졌고 잔디는 죄다 파였다.
우혁과 같이 앉아 있던 파고라의 벤치는 옆으로 넘어져 내동댕이쳐져 있다. 가지가 뭉개지고 꽃이 모두 떨어진 능소화를 보고 있으려니 채영이 그녀의 방을 신발 신고 들어와 마구 짓밟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엉망진창이네요.”
서아는 우혁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우그러진 철제 대문 사이로 깊게 파인 바큇자국을 보고 있었다.
“채영이가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안 써요.”
감정을 누르느라 힘겹게 이야기하는 서아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거기서 네 편을 들며 채영이를 자극해 봤자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너한테 들어가라고 한 거야.”
“알아요.”
“소문나면 마치 네가 윤채영이랑 나 사이에 끼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
“됐으니까 그만하라고요.”
서아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서아는 자기 목소리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감정이 목소리에 실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제기랄! 조금 더 강도 높은 욕이 없을까? 하느님, 제발 이대로 땅으로 꺼지든지 하늘로 솟구치게 해 주세요.’
서아는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휙 돌렸다. 우선은 무조건 이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여기서 계속 우혁과 말을 섞다 보며 결국은 화를 내고 말 것 같았다.
“장 대표님 오면 같이 식사하세요. 저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방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순간 우혁의 손이 서아의 어깨를 낚아챘다. 그대로 서아의 등이 우혁의 가슴으로 안겨 들어갔다. 서아는 마치 초고속 카메라로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먼저 날개뼈가 우혁의 가슴에 닿고 등과 허리가 그의 배에 닿았다.
날개뼈에서 시작된 파문은 점차 손끝부터 발끝까지 퍼져 온몸의 세포를 흔들어 놓았다.
“너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우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는 아무 말도 없었다. 둘 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혁 씨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는 거 알아요.”
“아니, 네가 꽃뱀이라는 소리까지 듣도록 놔두면 안 되는 거였어. 채영이가 그렇게 나오기 전에 내가 걔를 만났어야 했어.”
우혁의 턱이 서아의 관자놀이 부근에 닿아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숨결에 서아의 귀밑머리가 나풀거렸다. 어딘가 낯선 땅으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품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