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영은 자신의 전화를 차단해 버린 우혁 대신 민석에게 전화를 걸어 밤새 울고불고 나리를 쳤다. 민석은 떨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끌어올리며 제발 그만하자고 어차피 서아 씨가 아니더라도 우혁이는 너한테 관심 없다고 사정했다.
“아니, 내가 우혁 오빠를 잘 아는데 내가 조금만 더 정성 들이면 가능했어. 지난번에 사귄 김해인도 나처럼 쫓아다니다 결국 사귄 거잖아.”
“그래서 서너 달밖에 못 가고 헤어졌잖아. 그러니까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사귀지도 못한 거하고 사귀다 헤어진 거 하고 똑같아?”
“그런가? 아우, 너랑 통화하는 거 벌써 세 시간째잖아. 네가 하도 오래 말을 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민석이 길게 하품을 하며 통사정했다.
“좋아, 그럼 우혁 오빠 보고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그럼 오빠 풀어줄게.”
“지금 새벽 세 시야. 이 시간에 우혁이 보고 전화를 하라고?”
“우혁 오빠 창문에 불 켜져 있는데.”
“너 진짜 대박이다. 완전 스토킹 수준인데.”
“빨리 우혁 오빠한테 연락해 봐.”
“네가 아무리 졸라도 난 이 시간에 전화 못 한다. 그냥 내가 감당하고 말아야 할 것 같다.”
“좋아. 맘대로 해. 그런데 아침 8시까지 우혁 오빠가 나한테 전화 안 하면 나도 무슨 짓 할지 몰라. 알아서 하라고 해. 난 우혁 오빠한테 제대로 해명 들어야겠어.”
“야, 우혁이가 너랑 사귄 것도 아닌데 무슨 해명을 해?”
“시끄러워. 내가 우혁 오빠 때문에 이리로 이사 온 거 오빠도 다 알잖아. 그런 나를 놔두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듣보잡 가사도우미를 데려다 놓고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고? 난 도저히 용납 못해!”
“채영아, 너는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잖아. 그런 네가 뭐 하러 우혁이한테 매달리며 푸대접을 받니? 이번에는 그냥 포기하고 다른 사람 찾아보면 안 될까?”
“안 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빼앗겨 본 적 없어. 절대 그냥 못 넘어가!”
“우혁이는 너한테 일도 관심이 없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몰라.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우혁 오빠한테 전화하라고 해!”
협박의 말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민석은 반쯤 졸다가 다시 응? 하고 일어났다 또 졸기를 반복했다. 채영이 전화를 끊은 것은 새벽 다섯 시쯤 되어서였다.
잠을 설친 민석이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우혁의 집으로 들어섰다. 눈만 충혈된 것이 아니라 눈 밑은 거뭇하고 피부는 거칠어져서 세수도 하지 않은 것처럼 추레해 보였다. 아침을 먹기 위해 준비 중이던 우혁과 서아가 동시에 외쳤다.
“윤채영이 얼마나 괴롭힌 거야?”
열애설 발표를 하면서 세 사람 모두 윤채영에 대해 걱정했다. 우혁은 난 모르겠다며 채영의 번호를 차단했다. 민석이 내가 커버하겠다며 전쟁에 나가는 장수와 같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던 민석이 하룻밤 사이 초췌하게 변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우혁아, 채영이가 아침 여덟 시까지 자기한테 전화하지 않으면 각오하라는데.”
시계를 확인한 우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나? 벌써 여덟 시 십 분이네. 이미 늦었으니 그냥 밥이나 먹어야겠다.”
“채영이 걔 뭔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던…….”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안이 다 흔들리는 것만 같은 진동에 민석이 말을 중단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세 사람 모두 마당이 보이는 거실 유리창 앞으로 뛰어나갔다.
민석이 신음 섞인 ‘맙소사’를 내뱉었다. 놀란 서아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너무 크게 뜨는 바람에 눈썹이 이마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윤채영!”
우혁이 채영의 이름을 부르며 재빨리 신발을 신고 뛰어 내려갔다. 채영은 그녀의 랜드로버를 몰고 와서 우혁의 집 대문을 들이박았다. 철제 대문은 찌그러진 채 벌어졌다. 곧이어 앞 범퍼가 부서지고 전조등이 튀어나온 랜드로버가 급하게 후진했다.
랜드로버는 다시 부르릉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비스듬히 열린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철제 대문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랜드로버가 우혁의 집 마당으로 밀려들어왔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그대로 마당으로 들어온 랜드로버는 파고라 기둥을 들이박아 능소화 꽃 벼락을 맞으며 멈춰 섰다.
놀란 우혁은 마당으로 들어온 랜드로버를 향해 달려들었다. 요란한 소리에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혁이 랜드로버를 열자 차 안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윤채영!”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지만 윤채영의 머리는 핸들에 부딪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
“아쉽게도 그런 거 같은데. 나는 크게 다치려고 했는데 이 정도에서 끝났네.”
채영이 차에서 위스키 병을 손에 든 채 내렸다. 얼마나 취했는지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흔들거리며 차에서 내린 채영이 위스키 병에 입을 댔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우혁이 채영의 손에 들린 위스키 병을 빼앗았다. 채영은 어린아이처럼 악을 쓰며 당장 위스키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내놔! 내놓으란 말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채영이 발을 구르며 몸을 흔드는 바람에 피가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제야 얼굴이 축축한 것을 깨달은 채영이 이마에 손을 댔다. 붉은 피가 손등에 묻어나자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꺅, 어떻게 해. 피야. 피.”
발을 동동 구르는 채영을 본 서아가 거즈 수건을 들고 뛰어나갔다.
“우선 이걸로 닦고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아요.”
서아가 채영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채영이 적을 만난 암컷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렸다.
“이게 감히 어디서 내 몸에 손을 대!”
거즈 수건을 내밀던 서아가 당황해서 멈칫했다.
“너 꽃뱀이지? 우리 오빠 꼬셔서 한 재산 해 먹으려는 년이지?”
랜드로버가 대문을 밀어붙이는 소리를 듣고 나온 사람들이 여배우의 광란극에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구경에 나섰다. 서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은 분노에 찬 눈길로 서아를 향해 턱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