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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예진 Aug 26. 2024

44. 딱 하나의 부탁

주방에서 나온 장 대표의 손에는 사람 수만큼의 탄산수 병이 들려있었다. 서아는 장 대표에게서 탄산수를 건네받으며 눈인사를 했다. 목이 탔는지 탄산수를 반쯤 마신 고윤희가 꺼억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강우혁 씨, 우선 남편 죽고 우리 가족을 도와주신 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그 돈 드릴 때 틀림없이 서아 학비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고윤희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윤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이더니 서아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당황한 서아는 몸을 뒤로 젖혔지만 이미 그녀에게 손을 잡힌 뒤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내가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서아는 애써서 고윤희의 손을 밀어내며 이미 지난 일임을 상기시켰다.


“그래 지난 일이야. 나도 알아. 그래서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거야.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이제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는 천륜이 아니겠니.”


서아는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숨을 골랐다. 천륜이라니? 부모 자식 사이라니? 고윤희가 언제 그녀의 부모였고 서아가 언제 고윤희의 자식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시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성팔이 하지 마시고요. 당신이 서아를 자식으로 생각했으면 알라메종에서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을 뺏어다 엄한 남자 먹여 살리지는 않았겠지.”


우혁의 말에 서아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런 서아의 시선을 외면하며 윤희를 추궁했다.


“그 남자가 제 입으로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는데. 고윤희가 의붓딸 앵벌이 시켜서 자기 명품 사준다고.”


윤희는 눈물을 훌쩍이며 서아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서아야, 아니야. 그건 그냥 그 사람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야. 나는 정말 네가 번 돈 제인이한테 썼어. 그건 맹세할 수 있어.”


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윤희를 외면하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냥 더는 뵙고 싶지 않습니다.”

“나 뭐 얻으려고 온 거 아니야. 혹시 내가 돈이라도 뜯으러 온 거라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그런 거 절대 아니야. 그냥 너한테 용서를 빌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미안하다 서아야.”


서아가 고개를 돌려 고윤희를 바라보았다. 


“왜 저한테 용서를 비세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뭐 있다고?”


고윤희는 쉰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제인이 때문에.”

“네?”

“제인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이러다 정말 제인까지 잃을까 봐 겁이 났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냥 우리 두 사람을 네 가족으로 인정만 해주면 돼. 내가 네 엄마고 제인이가 네 동생이라는 거만 인정해 주면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게.”


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인을 봤다. 그제야 제인이 예전의 제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이 이십 킬로그램 이상 빠진 것 같았다. 눈은 퀭하고 길어진 목에 해쓱한 얼굴의 제인이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제인아!”

“언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렇게 오고 싶지 않았는데. 나 정말 언니랑 영원히 남이 되는 걸 견디기 너무 어려웠어.”


제인이 서아의 품으로 파고들어 목을 껴안고 어깨를 떨었다. 서아는 제인의 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제인아. 나는 네 엄마와 너를 예전처럼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알아, 언니. 내가 언니 너무 많이 힘들게 한 거 알아. 그래도 언니가 내 언니라는 거 그 사실은 변함없다는 걸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어.”


서아가 끄덕이며 땀에 젖은 제인의 앞머리를 바로잡아 주었다.


“응, 난 네 언니 맞아. 너는 은제인이고 나는 은서아인데. 네가 내 동생인 건 변함없어.”

“그럼 됐어. 이제 앞으로 절대 언니 괴롭히지 않을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막을 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고윤희가 우혁의 눈치를 살피며 제인의 등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제인아, 나 이제 절대 네 언니 안 괴롭혀. 강우혁 씨가 저렇게 떡 하니 지키고 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서아는 고윤희의 태도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윤희는 재차 두 사람한테 바라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저 내가 엄마고, 제인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만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서아야, 그런데 말이다.”


고윤희가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는 눈빛으로 서아 이름을 불렀다. 서아는 가슴이 철렁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팔짱을 끼고 고윤희를 지켜보던 우혁도 긴장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마음이 내키지 않을 테지만 딱 하나만 해주면 돌아갈게.”


서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고윤희는 손을 내밀며 주춤주춤 서아 앞으로 다가섰다.


“엄마라고 한 번만 불러주고 나도 제인이처럼 안아주면 안 될까? 이거 하나만 해주면 나는 네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게. 네가 인정해 준 걸로 나도 개과천선해서 지난 잘못 반성하며 살게.”


서아는 도대체 고윤희가 무슨 속셈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아가 아는 고윤희는 절대 개과천선 따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고 싶었다.


“죄송해요. 안아 드리는 것까지는 제가 내키지 않아 못 하겠어요.”

“그래? 그럼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고 가면 안 될까?”


서아는 차마 그마저도 거절하지 못해 고윤희가 내미는 손을 잡아주었다.


“이 엄마가 정말 잘못했다. 이제라도 네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윤희는 정말 애절한 목소리로 딸을 떠나보내는 엄마처럼 행동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쉽지만 돌아가마. 너희 두 사람 결혼할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으니 꼭 초대해 줘라. 제인이를 생각해서도 불러줘야 한다.”


고윤희가 옆에 있는 제인을 힐긋 보며 말했다.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설마 언니가 결혼식에 우리를 안 부르겠어? 그렇지?”


제인은 결혼식을 생각하자 기분이 좋은지 천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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