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보다 3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에는 도깨비와 함께 저승사자가 나온다. 저승사자는 현실에서 집을 구해 살며 회식도 하고 보고서 때문에 골치를 섞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저승사자의 모습은 '사신 치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저승사자인 치바의 활약을 그린 '사신 치바'가 나온 지 8년 만에 '사신의 7일'이라는 작품으로 치바가 돌아왔다. (사실 이 책은 2014년 작품으로 돌아온 지 10년이나 지났으니 치바가 돌아왔다는 말을 쓰기에는 좀 민망한 편이다.) 단편집이었던 전편과 달리 '사신의 7일'은 장편으로 스케일이 좀 커졌다.
유명 작가인 아마노베 료와 미키 부부는 일 년 전에 어린 딸 나쓰미를 잃었다. 나쓰미는 혼조라는 남자에게 납치당해서 살해되었다. 그런데 오늘 그 혼조가 무죄로 풀려나는 날이다. 문 밖에는 기자들이 몰려와 진을 치고 아마노베 부부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지켜보고 있다.
기자들은 어떻게든 아마노베 부부를 끌어내려 애를 쓰지만 부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자전거를 탄 채 유유히 그들의 집으로 들어와 벨을 눌렀다. 그들 부부는 무엇엔가 홀린 듯 문을 열어주고 그렇게 치바와 마주하게 되었다.
치바는 자신이 담당한 인간들에게 다른 감정을 갖지 않고 자기 일을 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일을 엄청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 소신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음악을 듣는다. 치바는 음악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사신이다.
사신들은 위에서 명단을 보내주면 담당하게 된 인간과 7일 동안 같이 지내며 그의 죽음을 승인할지 아니며 보류할지 정한다. 그런데 사신들이 너무 태만하게 제대로 심사도 하지 않고 죽음을 승인하는 바람에 저승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 상부에서는 그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신들에게 당분간 가급적이면 승인을 하지 말고 살려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치바는 그런 상부의 의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아마노베 료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 년 전에 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서 있지만 료는 알지 못한다. 낯선 사람인 치바가 자신과 유치원 동창이라 말하자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그를 곁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료는 치바가 두렵기도 하면서도 항상 곁에 있었던 존재같이 느껴지는 기이한 감정을 느낀다.
나쓰미를 살해하던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부모인 아마노베 부부에게 보내 그들을 지옥 속에 빠트린 남자 혼조는 태연하게 자신이 죄가 없음을 확인시키며 구치소를 나왔다. (아마노베가 확인한 후 영상은 삭제되게끔 만들어져 증거로 쓸 수가 없었다.) 언론은 그런 혼조에게 온갖 혜택을 제시하며 그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현실은 아마노베 부부를 배신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혼조가 그들의 덫에 걸린 것이다. 부부는 혼조가 법의 심판을 받게 놔둘 수 없었다. 그 악마는 자신들이 처단하겠다고 마음먹고 일 년 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들 부부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복수 때문이었다. 나쓰미를 고통 속에 죽어가게 만든 놈은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다.
아마노베 부부가 복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동행한 치바는 그렇게 7일을 함께 보낸다. 재미있는 것은 아마노베 료 뿐만 아니라 혼조에게도 가가와라는 사신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가가와와 치바가 모두 승인을 하면 두 사람은 다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부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환원 캠페인을 펼치고 있어 어떤 결말이 날지 알 수 없다.
복수를 하기 위해 일 년 동안 와신상담했지만 아마노베 부부는 서툴기 짝이 없다. 개미 한 마리 제대로 죽여보지 못한 이들 부부에게 아무리 원수라도 인간을 잡아다 가두고 복수하겠다는 계획이 그렇게 만만할리가 없다. 다행히도 그들 곁에는 치바가 있었다. 치바는 그들을 도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들이 위기에 처하면 구세주가 되어 있었다. 물론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치바가 도와줘도 혼조는 아직 가가와의 승인을 받지 않았으니 죽지도 않고 잘도 빠져나간다. 아니 도리어 아마노베 부부를 위협하고 조롱하며 상황을 즐긴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혼조와 아마노베 사이를 점점 좁히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온다.
가가와는 지도부의 환원 캠페인을 받아들여 혼조의 죽음을 승인하지 않고 20년을 연장했다. 죽지 않는 혼조에게 아마노베는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까?
결말은 읽어봐야 알 수 있다. 끝까지 읽는 재미를 내가 망치고 싶지는 않다.
심드렁하지만 자기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 치바 캐릭터가 꽤 재미있다. 그가 음악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것에서 약간 무라까미 하루키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단편으로 시작한 치바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쓰다 보니 사설이 좀 길기도 하다.
걸핏하면 인용하는 파스칼이 크게 와닫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요즘처럼 집중력이 짧아진 시대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대단히 재미있다는 뜻이다. 유튜브 동영상도 집중하기 어려워 쇼츠만 한 시간씩 보고 있는 내가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으며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수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상대방의 삶은 끝났는데 누구한테 복수가 되는 것인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글에서 복수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새롭게 출발하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라는 말을 읽고 이해했다. 복수를 당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복수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것.
평온하게 늙은 아마노베 미키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복수가 성공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