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보다 2
지은이 : 토머스 세비지
출판사 : 민음사
넷플릭스 영화 '파워 오브 도그'를 먼저보고 한참 뒤에 토머스 세비지의 동명 소설을 읽었다. 세 개의 ott를 구독하고 있으니 볼 수 있는 영상물은 넘치고 제대로 보는 것보다 미리 보기만 하다 지치는 요즘이었다. 어쩌다 보기 시작했어도 결말이 뻔히 보이면 지루해서 이 배속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너무 많아서 도리어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풍요 속의 빈곤 시대에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독특했다. 특히 기괴한 캐릭터의 열여섯 살짜리 남자아이의 복수는 단연코 최고였다. 출판사의 책소개에 소설가만이 행할 수 있는 '문학적인 복수'와도 같은 작품이라는 말은 적확했다.
토마스 세비지는 쇠라가 점묘화를 그리듯 촘촘하게 이야기를 직조한다. 그 촘촘함이 지나쳐 후반에는 너무 많은 사설이 붙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루해지기 전 초반의 서술은 매력적이어서 서부의 거대한 목장을 눈앞에서 보는 양 실감 났다. 덕분에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목장을 운영하는 형제 필과 조지는 완벽한 한쌍이었다. 필은 날씬했고 조지는 퉁퉁했으며 필은 영리하고 조지는 꾸준했다. 그렇게 일란성쌍둥이 같은 형제는 수없이 많은 방이 있는 대저택에서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쓸 만큼 돈독한 사이였다.
돈은 많으나 목장 일에는 관심이 없는 버뱅크 씨 노부부는 따로 호텔에 나가 살았으며 대규모 목장은 온전히 필과 조지 형제가 일꾼들을 거느리고 해 나갔다. 두 사람은 지역의 유지였으나 사교생활에 익숙지 않아 형제끼리만 소통할 뿐 다른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은 소떼를 기차에 실어 보내기 위해 들렸던 비치에서 식당 주인 로즈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필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로즈의 아들 피터를 암사내라며 망신 주었고 그 때문에 울던 로즈를 조지가 위로해 주었다. 조지는 그 순간 자신이 로즈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을 며칠 뒤에 깨닫게 된다.
돈 많은 목장주 조지가 아이가 딸린 과부 로즈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까지는 좋았다. 갑자기 신데렐레가 되어 버린 로즈는 행복할까? 어쩌면 행복할 수도 있었다. 필만 없었다면 말이다. 하루아침에 영혼의 단짝인 동생을 뺏은 여자는 변변하지 못한 술주정뱅이 의사의 아내였다.
언젠가 소떼를 구경하다 필의 총에 위협을 받기도 했고 술주정을 하다 필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던 로즈의 남편은 목을 매고 자살했다. 자신이 벌레보다 못하게 여겼던 남자의 아내와 결혼한 동생이라니 필은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 좋고 괴팍한 필의 공격 목표가 된 로즈는 숨 막히는 목장 생활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조금씩 망가져갔다. 마치 죽은 남편이 망가져가듯 그녀도 거대한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듯했다. 그런 로즈를 바라보던 피터가 엄마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열여섯의 한없이 여린 소년 피터.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닭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일을 거뜬히 해내던 피터는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며 로즈를 위로했다. 그녀는 어린 아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때를 기다리던 피터에게 필이 먼저 관심을 보였다. 로즈에게서 피터까지 뺏어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을 작정이었던 필은 상대를 너무 얕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상남자 필의 눈에 허약하기 짝이 없는 피터가 상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필이 피터와 가죽을 꼬아 밧줄을 만들어 가던 어느 날 여분의 가죽을 로즈가 팔아 버리는 실수를 했다. 절대 그 하찮은 돈에 가죽을 팔지 않고 태워버리던 필을 분노하게 만든 날. 피터가 자신이 가죽을 마련해 두었다며 피터를 안심시킨다. 소설 시작 부분부터 아무리 험한 일을 해도 장갑을 끼지 않는다고 했던 필은 피터가 준 가죽으로 밧줄을 완성시키고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영리하고 강한 남자였던 필은 피터의 내면에 있던 잔혹성에 매료되었고 의도치 않게 끌려갔다. 로즈에게 피터를 빼앗아 그녀를 절망에 빠트리려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책을 많이 읽은 피터는 탄저병에 걸려 죽은 소의 가죽이 필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꼼꼼하게 준비했다. 로즈가 여분의 가죽을 팔아버린 것은 결국 아들을 돕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아버지가 좌절해서 자살하는데 일조했던 필을, 엄마를 알코올중독자로 만든 필을 어린 피터가 제거해 버렸다. 책은 영화만큼 충격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먼저 영화를 봐서 그럴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갑작스러운 필의 죽음은 대단히 당혹스러웠다. 예전에는 활자가 영상을 압도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간결한 영상이 군더더기 없이 더 좋다고 느낀다.
영화에서 필의 역을 맡은 데이비드 컴버비치의 모습은 압도적인 필의 이미지를 정말 잘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