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기차역까지 조랑말을 끌고 마중을 나갔던 최 집사가 앞장서서 걸어 들어왔다. 조랑말에는 장연수가 흰색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에 모자를 쓰는 바람에 길쭉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가 덜 드러났다. 더군다나 배에서 그을려 얼굴도 적당히 가무잡잡하게 탄 것이 건강해 보였다.
장연수가 땀이 나는지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걸 본 여자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그의 땀을 닦아준다. 장연수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 집사가 떠날 때는 한 마리였던 조랑말이 두 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조랑말에는 낯선 여자가 타고 있었다.
장연수의 모자 빛깔과 똑같은 흰색의 레이스 양산을 들고 있는 여자는 앞머리를 둥글고 풍성하게 빗은 후 뒷머리를 틀어 올린 서양식 머리를 하고 있다. 살갗이 비치는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입은 신여성의 모습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골 아낙네들은 비록 자신들은 아이 젖을 먹이느라 짧은 저고리 아래로 가슴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지만 어깨며 팔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은 민망하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지주 장덕순의 아들은 유학 가기 전에 결혼한 몸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장연수가 신여성을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종일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달달 볶아대며 아들이 오는지 동구 밖에 나가보라고 성화를 대던 오씨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달려 나왔다.
“우리 연수 드디어 왔구나!”
아들을 반기러 나온 오씨가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자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는 능숙한 솜씨로 가뿐하게 조랑말에서 뛰어내린다. 그 자태가 제비처럼 날렵해서 보는 구경꾼들을 감탄시킨다.
“어머니, 뭘 그렇게 보세요. 저랑 같이 일본에서 공부한 윤미령 씨입니다.”
“그, 그러니? 반, 반가워요 아가씨, 이런 시골까지 우리 연수랑 같이 오시느라 고생 많았지요?”
오씨는 아들 말대로 그냥 일본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가 놀러 온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지만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사랑채로 가라고 이르자 연수는 먼저 미령이 있을 방부터 봐주고 가겠다며 안채로 들어간다.
장연수는 오씨의 뒤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본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윤미령이 머무를 손님용 방으로 본이와 시월이가 이부자리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걸 본 연수가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듯 하대하며 이따위 이부자리를 누가 쓰라고 가져왔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결국 그 방에는 본이와 연수가 쓰기 위해 마련해 놓은 원앙금침이 들어가고 말았다. 본이가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나오는 등 뒤에서 연수는 저 여자가 아직도 집에 붙어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며 씨근거렸다.
“네놈이 정말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사랑채에서 장덕순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곧이어 담배통이 청동화로에 부딪히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린다.
“어디 해괴망측한 차림의 계집을 집안에 데리고 들어와? 사내 녀석이 밖으로 돌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디 부모와 처가 있는 집안에 계집을 끌고 들어오는 본데없는 짓을 할 수 있느냐?”
“아버지 정말 저는 저 여자를 제 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결혼식은 했지만 저는 미령이를 사랑하니 그 여자랑 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 자식이 사 년간 엄청난 돈을 보내 공부시켰더니 고작 와서 한다는 소리가 제 처를 내쫓겠다는 말이야?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최 집사, 최 집사, 당장 들어와서 이 자식 끌고 나가.”
장덕순의 집안이 선대에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때문에 장덕순은 진짜 양반집 후손보다 더 양반가의 체통을 중요시 여긴다.
이제 반상의 구분이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재산의 유무가 지위를 결정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장덕순은 가문의 체통이나 남의 이목 따위에 집착한다. 그런 장덕순에게 아들이 신여성을 집에 들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연수도 이번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아버지, 제발 한 번이라도 미령 씨를 만나봐 주시기라도 하세요. 만나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수도 있어요.”
어림없을 것 같은 말이었는데 장덕순이 여자를 만나 보겠다고 했다. 막무가내로 고집 피우는 아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계집을 구슬리고 협박해 쫓아내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느 사이에 얌전한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고 머리까지 가지런히 틀어 올린 미령이 들어온다.
최 집사에게 듣기로는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 꼴이라고 했지만 막상 미령을 본 장덕순은 뜻밖에 인물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들어서는 여자의 자태는 며느리만도 못한 편이었다. 입 주변이 약간 튀어나오고 광대뼈가 선명하게 보이는 억센 인상이었다.
인상과 달리 곱게 손을 마주 잡고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는 테가 너무 익숙해서 신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연수가 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가?”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돌아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아버님의 처분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