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손님대접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신여성이라고 어디서 제멋대로 구는 계집애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더니 예상과 달리 얌전하고 말하는 모양새가 도리어 며느리보다 더 정숙해 보인다.

장덕순은 아들의 청이 터무니없다고 여겼던 초반의 생각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정 안되면 첩으로라도 허락을 해주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도 젊어서는 첩 두엇은 두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만석꾼 살림에 첩 하나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할 말이 없구먼. 그래 일본에서 우리 연수랑 같이 공부했다고?”

“네, 저희 아버님이 총독부에 계시기 때문에 내지에 친분 있는 분들이 많아서 여자 몸으로 멀리까지 가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장덕순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총독부라니! 언감생심 근처에도 못 가 볼 곳에 이 여자의 아버지가 있다는 말인가. 체통이며 양반 타령을 했지만 그건 지나간 이야기고 지금 진짜 양반은 관리가 아닌가.


“그래, 총독부 어디에 근무하고 계신가?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가?”

“재무국 국장을 맡고 계시며 성함은 윤자 도자 형자 되십니다.”

“어허, 이거 귀한 집 영애를 우리가 너무 푸대접했다는 생각이 드네그려. 자네 부모님이 이런 상황을 아시면 몹시 상심하시겠네.”

“저희 아버님은 연수 씨가 미혼으로 알고 계십니다.”


미령이 고개를 들어 살짝 웃는다. 이제 억세다고 느꼈던 인상은 당당한 신여성다운 품격으로 느껴진다. 장덕순은 그 웃음이 당신이 알아서 아들을 미혼으로 만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아 있던 연수는 아버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를 쭉 펴며 자세를 느긋하게 풀었다. 그리고 미령의 아버지가 요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총독부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졌는지 떠벌린다.


장덕순은 그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귀를 세우고 잔뜩 긴장해 있는 토끼처럼 보였다.


장덕순은 아들과 여자가 나간 뒤에 즉시 오씨를 불러 며느리의 방을 비우도록 했다. 귀한 손님이니 며느리가 잠시 방을 내주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놀란 오씨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며느리를 감싸고돌았다.


“영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새아기보고 방을 내주라는 건 연수 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제가 싫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네!”

“영감님!”


오씨가 장덕순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 아이는 총독부 재무국장의 딸이랍니다. 우리 연수가 총독부 관리의 사위가 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집와서 지금까지 사 년 동안 남편 없이 청춘을 보낸 아이를 내치겠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영감이 매일 말씀하시는 체통입니까?”


장덕순은 아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씨는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남편에게 대들 때면 일반적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이 철없는 여편네야 정신 차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우리가 지금은 만석꾼이라고 하지만 총독부에서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단박에 몽땅 빼앗기고 알거지가 되는 수 있어. 그런데 총독부 관리인 사돈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알지? 당신이 책임지고 며느리 내쫓아!”


“연수와 저 여자가 하는 말을 그렇게 단순하게 믿고 며느리를 내쫓는 것이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걱정하지 말게. 내가 최 집사 통해서 알아보라고 할 계획이니까.”


오씨는 말은 며느리 편을 드는 것처럼 하면서도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총독부에 밉보여서 땅을 모두 빼앗긴 수랏골의 김씨네를 떠올렸다.


결국 김씨는 대들보에 목을 맸고 그 식솔들은 만주로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남편 말대로라면 미령인가 하는 아이가 며느리가 되면 그럴 걱정은 없다는 것 아닌가.


부엌에서는 간장 양념된 갈비찜의 달보드레한 냄새가 진동했다. 기름 냄새, 고기 냄새에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집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입맛을 다셨다. 오씨가 직접 부엌에 들어와 상을 두 개 차리도록 명했다.


한 상에서는 장덕순과 장연수가 그리고 다른 상에 오씨와 손님이 먹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본이와 시월이는 물론이고 동이 어멈까지 말을 잃었다.


본이가 상을 들였을 때 방 안에 있던 사람 누구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본이가 방을 다 나가기도 전에 장덕순은 다정한 목소리로 윤미령을 향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들게’라고 했다.


본이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며 돌아서는데 오씨가 본이를 불렀다.


“얘, 아가야.”


순간 본이는 그래도 자신을 이렇게 내보내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하고 안도해서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네 어머님”을 외쳤다.


“아이고 깜짝이야, 얘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크니. 어른들 앞에서는 좀 얌전하게 굴어라. 네 서방님이 모시고 온 이분은 귀한 분이니 네가 아무래도 좀 더 신경 써서 대접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당분간 네 방을 손님에게 내 드리는 것이 어떠니?”


“네?”


“귀한 손님인데 아래채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오씨는 밥상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이야기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묵묵하게 음식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릴 뿐이다.


“어서 가서 네 짐을 아래채로 옮겨라.”

“하지만…….”


본이가 선뜻 응하지 않자 시아버지가 숟가락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기침을 한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본이에게 어서 나가보라는 눈짓을 한다.


본이는 쫓겨나듯 그렇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본이가 얼빠진 얼굴로 부엌에 들어가 부뚜막에 주저앉자 시월이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와 옆에 붙어 앉는다.


“아씨, 왜 그러세요? 또 무슨 일이래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본이가 서방님과 같이 온 여자 손님에게 방을 내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시월이가 이럴 줄 알았다는 탄식과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런데 정작 본이는 엉뚱한 걱정에 휩싸였다.


방을 내주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앞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화초장 안에 가득 들어있는 소설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걱정된 것이다. 본이에게 있어 그 책들의 안위가 곧 자신의 안위와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많은 책을 옮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시월이와 머리를 마주하고 상의한 끝에 급한 대로 화초장을 자수 보로 씌우고 병풍으로 가려놓은 뒤 간단한 짐만 빼서 방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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