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계절인지라 낮에는 제법 햇살이 강하지만 밤에는 으슬으슬 추웠다. 안채 마당에 심어놓은 배롱나무 가지에는 벌써 볏짚으로 옷을 해 입혔다. 다들 잠이 든 모양이다. 아직 짝을 찾지 못한 풀벌레만 요란하게 울어댄다.
본이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감싸 쥔 채 이제는 빼앗긴 자신의 방문 밖에서 서성였다. 그림자가 비칠까 봐 방문 앞에는 서지도 못하고 근처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내심 화초장 안에 든 소설들이 걱정되어서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러한 일인지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방안에서는 장연수의 말소리가 들린다. 그가 아씨 마님이라고 부르자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은 곧 멈추고 버스럭거리고 씨근덕거리는 소리로 바뀐다.
본이는 자신이 지금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았던 어떤 일들이 지금 저 문 안에서 이루어 있는 것이다.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궁금한 그 일이다. 여자가 발정 난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더니 곧 앙칼진 개가 짖어 대는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본이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떤 기운이 발가락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데 마치 송충이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처럼 근질거렸다. 혹시 정말 벌레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발을 털어보기도 했다.
그 사이 여자의 눌린 듯한 흐느낌 위로 장연수의 짧은 비명이 겹쳐졌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둠과 적막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 것만 같다. 본이는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시어머니가 찾는다는 말에 안채로 들어가던 본이는 자신이 쓰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이것들을 당장 없애버리라는 고함과 함께 방안에서 본이의 소설책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화초장을 열어젖히고 소설책들을 꺼내서 찢어발겼다. 마치 배를 가르고 난도질을 하는 것처럼 책을 찢어 마당으로 집어 던졌다. 본이는 자신의 몸이 칼로 베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님, 도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제 물건에 왜 손을 대시는 거예요?”
“뭐라고? 이게 네 물건이라고? 도대체 이 더러운 것들을 어떻게 구했는데 이게 네 물건이냐? 말 좀 해봐라. 네가 이걸 어떻게 사 모았는지 말이다.”
본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옆에 있던 동이 어멈이 끼어들었다.
“마님, 저는 부엌에 쥐가 들었는지 알았지 뭡니까요. 그랬더니 그 쥐가 글을 읽는 쥐인 줄은 몰랐습니다.”
본이가 눈을 치켜뜨고 동이 어멈을 노려보았다. 본이는 이불을 내주고, 방을 내주고, 서방님을 내주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화초장 안에 든 소설책을 내주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첫날밤부터 소박맞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 제가 소설책 좀 구해 읽은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요?”
“시어머니 앞에서 말대답을 또박또박하는 것을 보니 이제 네가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양반집 자식이라고 데려왔더니 본데없이 이런 음란한 것들이나 집안으로 주워 들이고 남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너는 연수가 싫다고 하지 않아도 쫓겨날 판이다. 이 더러운 것들의 내용을 내가 꼭 남들 앞에서 펼쳐놔야 네가 네 잘못을 인정하겠니?”
오씨가 펼쳐 놓은 소설책에는 남녀의 뜨거운 포옹 장면의 삽화가 있었다. 그걸 본 여자들이 요란하게 에구머니나 소리를 외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 가린 손가락 틈으로 조금 더 보고 싶어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래도 네가 할 말이 있니? 어디 양갓집 며느리가 남편 없는 사이에 이런 상스런 책들을 쌓아놓고 보니! 이것뿐이냐, 너나 시월이 년이 밤마다 여편네들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한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니? 부끄러운 줄 알면 가만히 있어라.”
마당에 널브러진 책들을 그러모은 최 집사가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시월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불길은 삽시간에 마른 종이를 집어삼켰다. 죽음으로 끝난 사랑도, 떠난 남자를 기다리던 순애보도, 기생이 되어야 했던 영채의 슬픈 이야기도 모두 재가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은 간부와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겠지? 우리 연수 앞길 막지 말고 당장 떠나거라.”
시월이의 훌쩍거림은 이제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본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바였으나 내치는 방식을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할 줄은 몰랐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신들은 본이를 며느리로 곁에 두고 싶지만 아들이 저렇게 고집을 피우니 어쩔 수 없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로 이혼을 진행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건 본이의 착각도 아주 큰 착각이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손해 볼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이 파탄 나는 모든 책임은 자기 아들이 아닌 음란한 책이나 읽고 있는 며느리 탓으로 만들고 싶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오씨 앞에서 본이는 딱 한마디만 했다.
“어머니, 너무 하세요.”
그 말을 하는 본이의 얼굴은 섬뜩할 만큼 싸늘했다. 잃을 것이 없어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오씨도 입을 다물었다. 본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단출한 짐을 꾸렸다.
만석꾼 집으로 시집와 사 년을 살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이제 재가 되어 버린 책들밖에 없었다. 하물며 친정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