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 년만의 단잠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오씨는 최 집사가 경성에서 윤미령의 아버지라는 윤도형 총독부 재무국장에 대해 알아오자마자 두 개의 봉투를 마련했다. 하나는 본이가 앞으로 혼자 살아갈 대책을 마련할 만한 제법 큰돈이 들어있는 봉투와 또 하나는 친정이 있는 조치원까지 갈 여비가 들어 있는 봉투다.


늦은 밤 본이의 방으로 찾아온 오씨는 남들 앞에서 며느리를 천하에 둘도 없는 간부 취급하던 시어머니가 아니다.


“미안하다 아가야,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네가 얼마나 억울할지 내가 다 안다. 하지만 네 시아버지가 저 아이를 며느리로 삼겠다고 작정하신 이상 너를 계속 곁에 둘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구나. 너야 가면 이 동네에서 더는 볼일 없으니 허물을 너한테 둔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어쩌겠니.”


본이는 시어머니가 그냥 단순한 악인이었으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모욕과 상처는 있는 대로 다 주고 나서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미움까지 받지 않으려는 태도는 시아버지보다도 욕심이 많아 보였다.


시아버지는 단순한 물질적 욕심에만 머물러 있지만 시어머니는 정서적인 욕심까지 부리는 사람이다. 본이는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동안 시어머니가 이렇게 접근할 때 대부분 마음이 풀어지고 화가 나 있는 자신이 도리어 옹졸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화초장 안에 들어있던 책들이 모두 재가 되어버린 지금 어떤 말도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수 없었다.


“이거 받아라. 하나는 네가 지금부터 혼자 살면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만한 돈을 넣었다. 그리고 이건 친정 가는 동안 쓸 여비다. 내일 일찍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누구에게도 인사 할 필요 없으니 그냥 조용히 떠나면 된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요?”


“응?”


“제가 억울해서 떠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럼 넌 남편이 유학 간 사이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던 몹쓸 간부가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이나마 내가 준비한 돈도 받지 못하고 쫓겨 날 테지. 그도 아니면 네가 견디지 못하고 두 손 들고 나갈 때까지 긴 싸움이 이어질지도 모르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결국 너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나가는 것이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가장 좋다.”


본이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본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소설들에 주인공은 모두 신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의 사랑에 걸림돌은 결국 자신과 같은 구여성과 남자 집안이었다.


그걸 보면서 본이는 어리석게도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었다. 자신이 실은 신여성에게 위협받는 자리에 있는 구여성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연애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비록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하고 있지만 정작 남편과 제대로 손 한번 잡아 본 일 없기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이런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착각이 신여성 입장에서 이야기를 읽게 만들었다.


“네가 그리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니까 내 말 알아듣고 내일은 떠나는 것으로 알겠다.”


시어머니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본이는 일어서지 않았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할지도 막막한 형편이다. 시어머니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돈만 주었다. 최 집사가 데려다 주지도 않을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본이와 시월이가 길을 나섰다. 장옷을 쓴 본이와 보퉁이 하나를 낀 시월이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누구도 그들이 언제 집을 나섰는지 알지 못했다.


최 집사에게 기차역까지 가는 방법을 물어볼까 하다가 오늘이 이천군에서 가장 큰 읍내의 장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날 읍내로 나가면 기차역까지 가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지난밤에는 억울하고 분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목을 매고 자살하면 이 집안사람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못한 것인 줄을 깨달을까 싶기도 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호소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어쩐 일인지 시집와서 처음으로 잠을 아주 푹 잤다. 사 년 내내 걱정하던 일이 막상 일어나자 더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마음에 도리어 잠을 잘 잤다.


자고 일어나니 어쩌면 이 집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쫓겨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나은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고리타분한 체면치레에 매달려 있는 오빠들이 무슨 소리를 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시어머니에게서 받은 돈이 있으니 그걸로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월이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어제부터 계속 훌쩍이고 있지만 본이는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점점 후련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찬바람이 얇은 치마 사이를 헤치고 들어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햇살은 강했지만 바람이 찼다. 서리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떨어진 가랑잎이 많아 길은 미끄러웠다.


사 년을 살면서도 이 길로 다녀 본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다. 시집온 이후로 집 안이나 집 밖이나 어디 한 곳 낯설지 않은 곳이 없다. 본이는 이제 고향엘 가건 다른 곳으로 가건 항상 낯선 느낌이 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둑길로 접어들자 가장자리가 갈대밭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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