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유성준은 여자의 몸에 기댈 수도 기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몹시 당황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창을 만났다. 그다지 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조선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친구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 아니던가.
일본에서부터 곧잘 경찰의 조사를 받거나 미행을 당하던 자신에 비해 자유로운 입장에 있던 동창에게 몇 가지 중요한 물건이 든 가방을 맡겼었다. 배에서 내리면 돌려받기로 했었는데 그만 길이 엇갈렸다. 결국 경성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찾아오던 길이었다.
가방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서둘렀다. 여자에게 화를 내기는 했지만 사실 여자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서두르다 도리어 더 늦어지게 되었다.
여염집 아낙 같은데 자신이 이런 식으로 몸을 기대도 되는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쪽 찐 머리 쪽으로 고개가 넘어갈 때마다 옅은 동백기름 냄새가 풍겼다. 희고 동그란 귀밑으로 우아한 목선이 내려와 저고리 동정 속으로 흘러내려갔다. 뒷머리 아래로 늘어진 잔머리 몇 가닥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앳된 새색시 같은데 신여성이나 기생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기품이 흘렀다. 처음에는 벌벌 떨던 계집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따라오면서 신이 난 모양이다. 보퉁이를 핸들에다 끼워놓고 앞바퀴를 이리저리 흔들며 따르릉 소리를 연발한다.
“이곳 분이 아니신 듯한데 도움을 청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용무가 있어서 친구를 만나러 오기는 했지만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우선 의원을 만나 다리를 보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지나가기는 했지만 마땅히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절을 걸어서야 겨우 읍내에 도착했다. 오른쪽 다리는 점점 부어오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절뚝거리는 남자를 부축하는 아낙과 그 뒤에 자전거를 끌며 따라가는 처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장터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나마 한약방이 빨리 눈에 뜨여 재빨리 그곳으로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장 구경 나온 아이들을 꼬리처럼 달고 다닐 뻔했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먼 거리를 걸었던 탓인지 유성준은 한약방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재에서는 쑥 냄새가 났고 바닥에 즐비하게 놓인 연고에서는 박하 냄새가 났다.
작두로 약재를 썰고 있던 의원이 유성준의 다리 상태를 살펴본다. 발목을 좌로 우로 흔들자 유성준이 비명을 지른다. 흙이 말라붙은 옷을 본 의원이 혀를 끌끌 찬다.
“보아하니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며칠 침 맞고 약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꼴이 이래서야 어디. 우선 침놔줄 테니 어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오.”
본이는 의원에게 데려다 주기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서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본이가 유성준의 처라고 생각한 의원은 본이를 놓아주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약은 하루 세 번 먹여야 하며 우선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과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내일은 온몸이 아플 것이니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까지 끝도 없었다. 손으로는 침을 놓으면서 입은 본이에게 환자 수발에 필요한 사항을 지시하고 있었다.
본이는 자신은 그저 난처한 상황에 놓인 남자를 도와줬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외간 남자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들어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쉽지 않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침을 놓는 동안 앓는 소리를 내던 유성준이 열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의원은 어서 가서 약을 달여 먹여야 한다고 채근했다.
“이곳 사람이 아닌데 혹시 근처에 머무를 곳이 있을까요?”
본이는 우선 남자를 뉘어 놓을 곳이라도 찾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허, 우리 집 뒤로 조금만 더 가면 장사치들이 머무르는 여관이 있으니 그리로 가보시오.”
약을 받아 든 시월이도 남자를 다시 부축해 나서기 시작한 본이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남자가 옷을 갈아입고 쉴 곳을 찾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본이에게 넉넉한 돈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게 되면 돈은 그때 돌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방을 잡아 놓고 시월이를 시켜 갈아입을 옷을 한 벌 사오도록 했다. 한의원에 갈 때까지만 해도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남자는 이제 횡설수설하며 헛소리까지 한다.
네놈들이 나를 가둔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고 고함을 치며 진땀을 흘리는 남자를 그냥 두고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이와 시월이는 유성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놓고 보지 않아 가면서 옷을 갈아입히느라 진땀을 흘렸다. 두 사람은 이불을 덮어 놓고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가며 바지를 벗겨 내느라 애를 쓰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워 깔깔대기도 했다. 벗겨 낸 웃옷의 안쪽에는 유성준이라는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본이는 푸른색 비단 실을 써서 수놓은 유성준이라는 글씨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이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다. 여관 주인에게 사정해서 약탕기를 빌리고 약을 달이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동이 신기한 힘을 주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쫓겨나는 것에 대해 분노와 억울함, 막연한 공포 따위에 뒤죽박죽이었다. 시월이는 그러한 상황을 울음으로 극복해 나가는 중이었고 본이는 자존심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데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남자를 챙기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두 사람 모두는 자신들의 처지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우선은 열이 펄펄 끓고 헛소리를 하며 손을 허공에 휘젓고 있는 남자를 보살펴야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