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이제 유성준이 정신을 차렸으니 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수원역까지 데려다줄 달구지가 다음 장날이나 되어야 떠날 수 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이틀을 더 머물러야 함을 안 본이가 여관 마루에 걸터앉아 앙상한 가지 끝에 걸린 손톱 달을 보고 있었다.
고즈넉한 밤이었다. 담장 너머에서 수런거리던 목소리도 사라지고 텅 빈 여관 마당은 바람소리조차 잠들었다. 겨우 보이던 손톱달도 구름에 가리고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본이의 어깨가 한기로 시렸다.
여관에 머문 지 며칠 만에 벌써 동무를 사귄 시월이는 밤마실을 나가 들어올 생각도 않고 손님 없는 여관의 주인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본이는 그동안 억눌렀던 설움이 목에 치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월이 앞에서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누구 앞에서도 울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데 불쑥 얼굴에 손수건이 와서 닿았다. 흠칫 놀란 본이가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 머쓱한 표정의 유성준이 앉아 있었다. 어둑한 마루 끝이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유성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앓느라 해쓱해진 유성준의 얼굴은 그녀가 자주 읽던 연애 소설의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그동안 그와 실랑이를 하지 않으면 눈 감은 그를 간호하느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그는 오뚝한 코와 짙은 눈썹에 신뢰감을 주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본이는 유성준이 내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남정네의 얼굴을 생각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여겼다.
유성준은 손수건만 내밀뿐 그녀가 우는 사연을 구태여 묻지 않았다. 여종을 대동한 여인네가 며칠씩 여관에 머무르며 처음 본 남정네 병간호를 하고 있다면 그 또한 여염집 여인으로써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니 묻지 않아도 여인의 사연은 기구할 것이다.
“제가 유 선생님 옷에서 꺼내 빨아놓은 수건인데 결국 제가 또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본이가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손수건은 임자가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본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훅 헛웃음을 웃었다. 그의 말투가 전에 듣던 말투와 다르게 좀 느물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은혜를 입고도 화만 냈습니다.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저희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적막을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그들 사이의 공백을 귀뚜라미 울음이 메우기 시작했다. 유성준은 자기 가슴이 왜 이리 뻐근하고 아픈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흐느낌을 멈추었지만 속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겉으로 울 때보다 더 큰 울음이 들리는 것만 같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냥 그렇게 두 사람은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게 영겁의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몇십 분의 시간에 불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시간 끝에 유성준의 손이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쥐고 있는 본이의 손등을 덮었다.
놀란 본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울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성준은 다른 손으로 눈물로 얼룩진 본이의 뺨에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댔다.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절대 함부로 이러면 아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울고 있는 작고 가여운 어린 새 같은 여인네가 그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다.
본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두려웠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그녀를 덮쳤다. 그건 서러웠던 그녀의 마음을 죄다 녹여주고도 남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많은 연애소설을 읽었어도 거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기묘한 두근거림이었다.
그의 손바닥 아래 있는 자신의 손을 빼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본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끄러미 그를 보고만 있었다. 유성준은 차마 본이의 뺨에 자신의 손을 대지 못하고 내렸다.
유성준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본이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유성준도 엉겁결에 엉덩이를 밀어 옆으로 떨어져 앉았다. 마실 다녀온 시월이가 들어오다 말고 마루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아픈 사람이 왜 찬바람 쏘이며 밖에 나와 계신데요? 아씨도 그러다 고뿔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어서!”
두 사람은 시월이의 재촉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