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무례한 남자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유성준은 삼일 밤낮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잤다. 결국 다리에 침을 놓기 위해 의원을 여관으로 모셔 와야 했다. 의식이라도 있어야 유성준의 친구를 불러서 맡겨놓고 갈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의원은 염좌에 고뿔까지 겹쳐서 탈진한 모양이라며 숟가락으로 흘려 넣어서라도 약을 먹이라고 했다.


본이와 시월이는 번갈아 가며 환자를 돌보고 약을 달이는 틈틈이 읍내 구경을 하기도 했다. 친정인 조치원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수원역까지 가야 하는데 읍내에 있는 몇몇 상인들이 수원역을 다닌다고 했다. 얼마간의 돈을 주면 달구지를 얻어 탈 수 있다는 말에 한시름 놓았다.


눈을 뜬 유성준은 목이 몹시 말랐다. 입술이고 입안이고 바싹 말라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았다. 물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겨우 ‘무우울’이라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자신이 가방 때문에 이천에 왔다가 자전거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 그 여자들 때문이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물이라는 소리를 한 번 더 하자 갑자기 입에 따뜻한 사발이 와 닿았다. 유성준은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삼키고 있자니 그것은 물이 아니라 쌉싸래한 탕약이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시는가 봅니다.”


도대체 얼마나 여기 누워 있었던 것일까? 유성준이 겁이 덜컥 났다. 만약 가방이 다른 사람 손에라도 들어간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율면엘 가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두 여자가 자신의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사흘을 의식 없이 누워 있었으면서 어딜 움직인다고 야단이에요.”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잖아. 당신들만 아니었어도 벌써 가방을 찾았을 텐데. 당신들이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인 건지 알기나 해?”


본이와 시월이는 거칠게 소리 지르는 유성준의 기세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도 아니고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폈더니 당신들 때문이라니 기가 막혔다. 본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시월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서럽게 울며 집을 나온 시월이지만 읍내에서 맛있는 것들을 실컷 사 먹고 재미있는 구경을 하면서 다시 예전의 천방지축 망아지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진짜, 뭐 이런 양반이 다 있대요. 우리가 기차 타러 가지도 못하고 생돈 써가며 의원 모셔다 침놔주고 약 달여 먹이며 병구완했더니 뭐? 우리 때문이라고? 말 다했어요?”


어린 계집이 대차게 나오자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유성준이 주춤한다. 생각해 보니 그네들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상 이 사람들이 못 본 체 내버려 두고 갔더라면 더 큰일이 날 뻔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더군다나 남정네를 이렇게 보살펴 준 여자들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가방을 생각하면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중요한 가방을 찾으러 가던 길이었기에 내가 성급하게 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성준은 그제야 자신이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발목의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라면 어차피 저희가 도와드리는 김에 더 도와드릴 방도를 찾아볼 테니 어디로 가시려던 것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시월이는 그러한 본이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자꾸만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그만 손을 떼자고 눈치를 준다. 하지만 본이는 어쩐지 이 사람이 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느낌에 막연하나마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율면의 한내에 사는 장연수라는 사람을 들어보셨습니까?”


장연수라는 이름을 들은 본이는 당황한 속내를 감추지 못한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시는 모양입니다. 하기야 만석꾼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드물겠지요.”


본이는 시월이가 끼어들기 전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저희가 율면에서 왔기에 알기는 하지만 그 집이라면 저희가 도와 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미음을 좀 드시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갑자기 경직된 본이의 목소리에 유성준은 자신이 무례하기 군 것 때문에 뒤늦게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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