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고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갈대가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보자니 공연히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환한 빛 덩어리가 본이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햇살을 받고 빛나는 바퀴 두 개는 일본어로 읽은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아폴론이 타는 화차의 바퀴가 아마도 저처럼 빛났을 것이다.


빛 덩어리는 순식간에 본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얼떨결에 옆으로 비켜서면서야 그게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눈이 부신 데다가 속도가 빨라 자전거에 탄 사람d 제대로 볼 겨를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직도 울며 따라오던 시월이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본이가 뒤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어이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월이를 피하던 자전거가 강물 쪽으로 나동그라졌다.


자전거는 다행히 풀숲에 떨어져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있던 사람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깊지 않은 강 가장자리에 빠졌지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본이와 시월이가 달려가자 겨우 균형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다리를 다쳤는지 발을 땅에 딛지 못한다. 잘 차려입은 옷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동그란 뉴스보이캡은 물 위에 둥둥 떠다녔고 체크무늬 헌팅 재킷은 흠뻑 젖은 대다가 진흙까지 묻어 있었다. 남자는 시월이와 본이를 보자 손에서 물을 튕겨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봐요, 앞에 뭐가 오는지 보지도 않고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어찌합니까? 이거 어쩔 거예요?”


어떻게 물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걷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다. 본이는 누군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앞에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을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사람 잘못이 더 큰 것 같은데요.”


“나는 속도를 줄인 참이었다고요. 그런데 굴곡이 심한 길에서 저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튀어나오니 내가 피할 길이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이를 어쩌지요. 죄송합니다.”


평소 같으면 언성을 높이며 싸우려 들었을 시월이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있다. 말로만 듣던 자전거가 저렇게 나가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집 한 채 값이라는 자전거가 고장이라도 나서 물어달라고 하면 어쩔까 싶은 것이다. 집에서 쫓겨난 처지에 시비까지 붙게 되었으니 겁이 날만도 했다.


“시월아, 네가 잘못한 일 없으니 그만해라.”

“아씨, 그래도 저를 피하려다 물에 빠지셨는데.”


“나는 바퀴 달린 것은 어떤 것이든 사람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 사람은 우리를 보고도 그 바퀴를 조심해서 움직이지 않았어. 네 잘못 아니다.”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고 본이를 노려보았다. 실제로 바퀴 달린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본이의 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쩐지 얼굴을 장옷으로 가린 채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이 촌색시가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람은 지금 큰소리를 칠 형편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도움을 요청하며 사정을 해야 할 처지인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봐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나치게 오만하거나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다. 본이는 시간을 끄는 것이 남자의 상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렀다.


“지금 제가 보기에 잘잘못을 따질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곤란하실 것 같거든요.”


그제야 남자는 오른쪽 다리 상태로는 여기를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목이 부어오르는 것을 봐서 무언가 이상이 있기는 하다. 거기다 속옷까지 젖어버린 탓에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게 떨려왔다.


“험, 험 그러니까 연약한 여인네들이 나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선 이것으로 몸을 좀 덮으시지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 나겠습니다.”


본이는 장옷을 벗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말로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 마음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록 외간 남자와 이렇게 마주 서서 대거리를 하는 것이 겁이 나는 일이기는 했지만 곤경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하고 달아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자전거는 저 아이가 끌고 제가 부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나올 때까지만 같이 가시지요.”


본이가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본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서방님을 이부자리로 옮기느라 팔을 끌어 보고는 남자 팔이라고는 처음 잡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능숙하게 남자의 겨드랑이를 끼고 그의 체중을 자신의 몸에 실었다. 본이는 낯선 남자의 팔을 잡으면서 이제 시댁을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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