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나키스트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유성준은 재떨이에 쪽지를 찢어 넣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분노 때문에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 성냥개비가 자꾸만 부러졌다. 성냥갑째 부숴 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 집을, 이 도시를, 이 섬나라를 모두 부숴버리고 싶었다.


남의 나라를 제 것인 양 차지하고 앉아서 횡포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한민족의 숨통을 죄고 있는 일본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동지들이 체포되어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이 마당에 자신은 한가하게 달빛아래 흩어지는 꽃잎만 보고 있었던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벽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주먹으로 벽을 치자 허술한 목조 건물이 흔들거렸다. 누군가 어떤 미친놈이 한밤중에 소란이냐며 소리를 지른다.


유성준은 누군가 자기를 찾아와 시비를 걸어주기 바라며 더욱 요란하게 벽을 걷어찼다. 제발 나를 한 대 쳐다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 분노를 모두 쏟아 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삭빠른 일인들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자신들만 손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니 말이다.


박열 동지 부부가 왕세자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나서 동경에 있던 아나키스트 조직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서상경, 홍진유 등은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불령사는 동경의 아나키스트 조직인 흑우회의 하부 조직에 불과했다.


박열 부부가 불령사를 조직해서 폭탄을 구하다가 체포되었지만 조직의 입장에서 불령사는 도마뱀의 꼬리와 같았다. 잘라낼 때는 고통스럽지만 잘라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다시 재생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불령사는 간판까지 내걸었던 공개적인 조직이었다.


더군다나 폭탄을 구한 것도 아니고 구하기 위해 논의했다는 죄목으로 박열 동지를 체포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희생양 만들기였다.


관동 지역의 대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 그리고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구속하거나 죽였다.


서슬 시퍼런 당국의 체포 작전 속에서도 유성준은 용케도 빠져나갔다. 그를 미행하다가 가끔 마주치는 경찰관 겐지는 장발장의 자베르 경감처럼 너를 언젠가는 체포하고 말겠다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유성준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흑우회 핵심 멤버지만 함부로 신원을 노출하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가졌다.


유성준의 부친은 은행을 소유한 호남 최고의 갑부 유철호다. 유성준은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이회영 선생처럼 중국으로 망명해서 사십만 원가량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쓴 사람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단 십 원도 내어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어 놓기는커녕 아들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알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인물이다.


조선 팔도에 아들이 널렸는데 유성준 하나쯤은 없어도 그만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어머니다. 첫 번째 부인이 죽고 정실로 들어왔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전처소생인 유성준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유성준이 아버지 눈 밖에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부족한 것 없는 삶이지만 실제로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처지였다.


유성준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끔 울적해졌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친어머니 이상으로 그를 아껴주었던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요령 좋고 여우 같은 여자들과 그녀들이 낳은 셀 수 없이 많은 자식 틈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박열 동지와 같이 체포되었다 풀려난 서상경, 홍진유 동지가 조선에 돌아가서 만든 조직이 흑기연맹이다. 그런데 제대로 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흑기연맹 동지들이 체포된 것이다. 유성준은 갈수록 그물망을 좁혀가며 훑어대는 당국의 감찰에 흑우회마저 와해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스러웠다.


밤새 자신을 학대하던 유성준은 날이 밝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다.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아이자와 사부로 교수는 유성준의 연락책이 되어 주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의 존재가 아직 당국에도 알려지지 않아서 유성준은 비교적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겐지가 아무리 뒤를 밟아도 교수의 연구실까지는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교수실에 들어가자 일찌감치 나온 아이자와 선생이 차를 내리고 있었다.


교수실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와 선생이 좋아하는 계피 과자 냄새 그리고 지금 막 내리기 시작한 차의 은근한 향기가 뒤섞여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밤 격한 분노에 휩싸였던 유성준은 소파에 앉으면서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알고 있네. 당국은 어떤 독립 단체보다 아나키스트들을 두려워해서 조금만 싹이 보여도 무조건 잡아들이려고만 한다네.”


“도대체 아직 아무런 활동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연맹을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사유가 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목소리 낮추게. 겐지의 귀만 귀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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