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겐지의 미행도 뜸해져서 큰 부담 없이 배를 탔다. 그런데 막상 배 안에서 종종 마주치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장연수를 보자 무조건 가방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에는 조선에 들어와서 접촉해야 할 인물들과 활동 계획, 그리고 비밀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에스페란토어와 영어를 뒤섞은 암호문으로 작성되어 있어서 설사 당국에 들어간다고 쳐도 내용이 쉽게 탄로 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들고 있는 것보다는 장연수에게 맡기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장연수는 무슨 생각인지 이유도 묻지 않고 가방을 맡아 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진즉 연락을 했어야지.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인데.”
유성준은 장연수의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어리둥절했다. 그다지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닌데 서슴없이 친구라는 말을 하는 장연수의 넉살에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 인력거를 준비할 테니 우리 집에서 몸조리를 더 하고 돌아가게. 자네가 찾으러 왔던 가방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유성준은 가방을 받아 들자마자 장연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손으로 가방 바닥을 쓸어보았다. 물건이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싶어 손끝이 달달 떨렸다.
가방 밑으로 약간 처진 사각형의 윤곽이 잡히는 것이 비밀 주머니에 든 물건은 무사한 것이 틀림없다. 그제야 긴장으로 뭉쳐있던 심장의 근육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이자 장연수는 유성준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오해했다. 유성준은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여기까지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는 장연수에게 지금 움직이는 것은 몸에 더욱 좋지 않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유성준의 거절이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장연수가 방금 생각난 것처럼 무릎을 치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아버님이 대일은행 소유주인 유철호 회장님 아닌가?”
그제야 유성준은 장연수가 왜 그토록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지 알 수 있었다. 평생 자신에게 도움 될 일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이럴 때 힘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일본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성준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디 내가 대일은행 장남이라는 사실을 소문내지 말아 주게. 우리 아버지는 내가 좀 더 평범한 생활 속에서 많은 공부를 하며 아버지를 도울 다양한 사업적 정보를 수집하기 바라시니 말일세.”
장연수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가방 안에 들어있던 뜻 모를 문자의 내용이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수집한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럼 자네는 혹시 백 정보의 땅을 맡기면 얼마나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나?”
“글쎄 내가 아직 은행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건 좀 어려운데.”
“그럼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한 번쯤 자네가 나서서 도와줄 수는 있을 테지?”
“그럼,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게.”
장연수는 제대로 된 인맥을 하나 만들었다는 만족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성준은 아버지 재산을 거덜 내고 싶어 몸살이 난 장연수를 보면서 자신의 탐욕스러운 동생들을 떠올렸다.
이자는 이본을 알고 있을까? 같은 마을 사람이라고 하지만 여염집 아낙을 알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본이라는 처자를 아는가 물어보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름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인데 어디서 들어보기는 들어 본 것 같으이.”
장연수는 자기가 쫓아낸 조강지처의 이름조차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그저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여기고 말뿐이었다. 유성준은 가방을 무사히 돌려받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는 영영 여자를 만나지 못하리라는 아쉬움에 방구석에 놓인 장옷을 흘끔거렸다.
이본은 외간남자의 몸을 덮었던 장옷을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았을까. 어찌 된 일일지 장옷을 놓아두고 갔다. 유성준은 마치 그 초록색 장옷이 정표라도 되는 듯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느라 장연수가 이본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