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장연수는 집에 돌아오면서도 계속 이본이라는 이름이 입에 맴돌며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최 집사를 향해 자네 혹시 이본이라는 여자를 아는가 물었다. 최 집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빤히 장연수를 올려다보았다.
장연수는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아버지의 지나친 신뢰를 받고 있는 집사가 마뜩잖았던 장연수는 불쾌한 시선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뭐 못 물어볼 것을 물어보았나?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가?”
“도련님, 정말 그게 누군지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모르니까 묻지 그럼 알면서 묻겠나?”
“도련님이 쫓아낸 아씨 아닙니까? 아무리 도련님이 애초부터 마음이 없었다고 하지만 정말 해도 너무 하시네요.”
말문이 막힌 장연수는 되바라지게 구는 아랫것들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최 집사, 우리 집에서 몇 년이나 있었나?”
“네?”
“아버지는 믿을 만한 사람이 오래 일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실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거든. 한 사람이 지나치게 오래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도 하거든. 거 있지 않은가. 고인 물은 썩는다고.”
장연수가 안경을 벗어 들더니 안경알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들더니 갑자기 최 집사에게 안경과 수건을 넘겼다.
“여기, 여기 얼룩이 좀 보이지 이것 좀 깨끗하게 닦아주게.”
최 집사가 잠자코 안경을 받아 들자 장연수는 실눈을 뜨고 최 집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말이야, 주제 파악 못하는 인간들이 제일 싫어. 그 본인가 하는 여자도 주제 파악 못하고 촌닭 주제에 내 마누라를 하려다 쫓겨났잖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좀 제대로 해봐. 이거 안경알도 하나 제대로 못 닦잖아.”
장연수는 최 집사가 문지르고 있던 안경과 수건을 낚아채듯 잡아 빼앗아서 안채로 들어갔다. 도대체 유성준은 왜 자신의 전처에 대해 궁금해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 년간 집에만 있던 여자가 어떻게 유성준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내일 다시 나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연수가 다음날 여관을 다시 찾아갔을 때 이미 유성준은 그곳을 떠난 뒤였다. 유성준은 가방을 찾은 이상 무리가 되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경성으로 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럼에도 가방 깊숙한 곳에는 본이의 초록색 장옷이 곱게 접혀 들어가 있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발목이 시큰거릴 때마다 자신을 부축하던 본이의 팔목이며 동백기름 냄새, 얌전한 필체, 놀란 듯 말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더욱 세차게 페달을 밟았고 발목에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유성준은 조선에 들어올 때 이미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다. 아이자와 선생은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여러 번 했지만 혁명을 하려는 자가 몸을 조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혁명은 문자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 혁명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겁을 집어먹는 것이 아나키스트인 까닭은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유성준이 가방에 목을 맨 것은 실제로 문서 때문이 아니었다. 문서 아래쪽에 있는 비밀 주머니에는 두 개의 폭탄이 있었다. 장연수는 가방을 열어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들추어도 알 수 없는 문자로 쓴 노트만 보였을 것이다.
가방 바닥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그 밑에 폭탄이 두 개 들어있다. 폭탄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쓰일 것이다.
가방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돌아가는 길에는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떠나 있던 조선 땅은 그대로인데 그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백성들의 모습은 전보다 훨씬 어려워 보였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이삭을 줍고 있던 아이들이 자전거를 보자 달려들었다. 짚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아이들의 새까만 맨발이 눈에 밟혔다. 유성준은 이 아이들이 일제의 억압 속에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