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일인 스승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아이자와 선생이 날카로운 눈매를 번쩍이며 주의시켰다. 유성준은 그런 아이자와 선생을 보면서 일인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지적이면서도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냉철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는 유성준에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마음을 합친 사람이 조선인 아버지 대신 일본인 스승이라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생각할 때면 유성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당분간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지내게. 조직은 더 이상의 피해를 원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네. 자네가 다치게 될까 봐 걱정스럽네. 무조건 강하려고만 했던 항우를 생각해 보게.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는 다 알지만 결국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야. 물론 이야기꾼들은 항우를 사랑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유방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린 것을. 나는 무조건 제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자들은 결국 항우처럼 무너지고 말 것으로 생각하네.”


“하지만 너무 억울해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조선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자네 마음은 알아. 우리도 자네가 조선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분노가 차오를 때일수록 냉철해지게. 게무야마 센타로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면서 무질서나 혼돈 따위의 상징으로 아나키즘이 인식되지만 실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이념이 폭력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의존하는 것만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것을 잊지 말게.”


유성준은 아이자와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한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무리 이념적인 동지라고 해도 선생은 언제까지나 일본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동지 이전에 동포가 체포되어 고통스러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아이자와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은 선생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건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자네 도마뱀의 꼬리에 대해 알고 있지? 도마뱀은 꼬리를 재생시킬 수 있어서 위험이 닥치면 끊어내고 달아나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지. 하지만 도마뱀이 가진 재생 능력은 평생에 딱 한 번 뿐일세. 위험하다고 아무 때나 꼬리 끊어내고 다시 살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불령사도 그렇고 흑기연맹도 체포되었네. 우리는 이제 더는 끊어낼 꼬리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네가 함부로 경거망동하다 다치면 도마뱀은 꼬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잃는 것이 된다네. 내 말 가볍게 듣지 말고 조심하게.”


유성준의 앞에 놓인 차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이자와 선생은 식은 찻잔을 비우고 다시 우린 차를 부어 주었다. 유성준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환하게 웃으며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겠노라 다짐하던 서상경과 홍진유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일뿐이라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교수실을 나오자 건물 반대편 기둥 뒤에 서 있는 겐지의 모습이 보였다. 단신에 호리호리하고 평범한 얼굴인 겐지는 누군가를 미행하기에는 최적인 외모를 가졌다. 아이자와 선생이 철저하게 자기 이념을 감추고 있으니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유성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유성준은 겐지에게 보여주기 위해 교수실을 향해 이따위 엉터리 과제를 내는 교수는 교수 자격이 없다고 고함을 쳤다.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성준은 손에 들고 있던 원고지 뭉치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동급생을 붙들고 아이자와 선생이 자신에게 빠가야로라는 말을 했다며 언성을 높였다.


동급생은 평소에 점잖은 유성준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안 가득 여기저기 잘린 목들이 굴러다녔다. 피가 낭자한 방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그 곡소리가 점점 커져서 고막이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유성준은 그 방에 자신이 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자신도 그 잘린 목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여자가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라도 알아 둘 것을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곧 이제는 여자를 잡을 수 있는 손도 없고, 여자를 안을 수 있는 가슴도 없는데 그걸 알아봤자 무엇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손님, 손님 괜찮으세요?”


유성준은 누군가 자신의 몸을 흔드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손으로 목을 만져 보았다. 피는 아니었다. 손도 멀쩡해서 이렇게 목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꿈이었구나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손님, 장연수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뭐, 뭐라고? 정말이오? 정말 장연수라고 하였소? 어서, 어서 들어오도록 좀 해주시오!”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가 나가고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현기증이 나서 도로 주저앉았다. 지난 몇 달간 아이자와 선생이 시키는 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엎드려서 당국의 관심을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수업에 충실했고, 날마다 권투를 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 축구를 했다. 겐지마저 유성준에게서 관심이 멀어질 만큼 운동에만 매달렸다. 특히 권투는 그가 삭이지 못하는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덕분에 그 사이에 교내 복싱대회에서 정경학부 대표로 나가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인데 겨우 자전거에서 떨어져 이 꼴로 누워 앓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장연수가 갈색 가방을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와세다대학 조선인 학생 모임에서 가끔 만나면 인사만 하던 사이였다. 독립이나 민족의식 따위에 대한 관심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여학생 꽁무니나 쫓아다닌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한심한 종자로 경멸했던 인물인데 이렇게 유용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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