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혼란스러운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본이의 얼굴을 본 시월이가 혀를 찼다. 시월이 눈에는 눈물 자국만 보일 뿐 그 이후의 일을 알 턱이 없었다.
“아씨, 우셨구먼!”
본이가 고개를 흔들며 눈을 피하자 시월이는 대뜸 빨리 여기를 떠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아씨, 소달구지 모는 박씨가 장날이 아니어도 돈만 조금 더 주면 갈 수 있다고 하던데 그냥 내일 가버릴까요? 여기 있어봤자 아씨 속만 더 상할 것 같아요.”
본이는 그가 쥐어준 손수건을 손에 꼭 쥔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시월이의 말이 옳다. 한시라도 이곳을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것은 좀 전에 그의 손길이 너무 강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본이는 날이 밝자마자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한 통은 율면의 장연수에게 전할 편지였다. 읍내의 성빈관에 유성준이라는 친구가 당신을 찾아오다 다쳐서 누워 있느니 급하게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 한 장은 유성준에게 쓴 편지였다.
유성준 귀하
옷을 빨다가 윗옷 주머니에 수놓아진 이름을 보았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다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여겨져 그동안 머물렀습니다. 남녀가 유별한지라 이 이상 저희가 지체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회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싶으니 저희는 가던 길을 가겠습니다.
여관 주인을 통해서 장연수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놨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몸조심하시고 찾으시는 물건 무사히 돌려받기를 바랍니다. 자전거는 여관 주인에게 잘 보관해 놓도록 당부해 놓았습니다.
― 이본
편지를 손에 든 유성준은 여자의 이름이 이본이었구나 생각했다. 본이라니 여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본에는 뿌리, 기초, 근본, 기원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여자는 이름이 가진 의미 이상으로 내면에 큰 힘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녀가 어디 사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여관비며 치료비며 돈이 제법 들었을 터인데 그조차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떠나다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당당하게 따지던 목소리, 자신이 터무니없이 화를 냈음에도 도와주고 싶어 하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의 손안에 들어왔던 작은 손, 연약한 어깨. 그 순간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고, 누구의 마음에도 남아서는 아니 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녀는 이렇게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백번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와 더 마음을 나누면 그녀도 자신도 상처 입을 일밖에 없다. 동지들이 말했었다. 네가 행동해야 할 때 주저하게 만드는 존재를 만들지 말라고. 그녀가 하루라도 더 머무른다면 어쩌면, 어쩌면…….
유성준은 자신이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에 그녀의 눈물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라고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며 여자의 모습을 떨쳐내려 애썼다.
여관에서 일하는 계집아이가 약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같이 있던 아씨가 부탁했다며 앞으로 먹을 약은 자신이 달여 주기로 했단다. 유성준은 약을 마시면서 여자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던 동백기름 냄새를 떠올렸다. 갑자기 몸의 어딘가가 쿡쿡 쑤셔왔다. 그게 가슴인지 발목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다섯 달 전 유성준은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보름달이 어찌나 밝은지 어둠 속에서도 담배를 찾아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집주인 노파에게 얻어 마신 정종 한 잔 때문인지 여간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술을 마시려면 제대로 마셨어야 하는데 얼떨결에 마신 정종은 마음만 흐트러트렸다. 창밖으로 벚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동경 시내는 온통 벚꽃으로 가득하다. 아무리 사월 햇살 아래 꽃이 화사해도 일본인들이 그리 아끼는 벚꽃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름달이 뜬 한밤중 창문 밖으로 연분홍 꽃잎이 춤추듯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었다. 애상에 젖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되었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밀어내려 애를 쓰면 쓸수록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공연히 심란해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빛도 흐려졌다고 느꼈을 즈음 누군가 방문을 짧게 두 번 두드린다. 깜짝 놀란 유성준이 재빨리 일어나 문 옆에 서서 가격 자세를 취했다. 누군가 치고 들어오면 재빨리 옆구리를 걷어찰 수 있는 자세다.
곧이어 다시 짧게 한번, 길게 세 번을 두드린다.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짧게 두 번은 비상이라는 의미이고, 다시 짧게 한 번은 급한 메시지를, 길게 세 번은 넣어 놓기만 하고 간다는 소리다. 문틈으로 쪽지 하나가 들어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유성준은 불을 켜고 쪽지를 펴 들었다.
4월 7일 경성 흑기연맹 이창식, 서상경, 홍진유 등의 동지 전원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