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시월이의 방에 몇 명의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남포등불빛 아래 댕기 머리 그림자가 오락가락한다. 시월이와 같이 어울리던 마을 처녀도 있고 사랑채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숨을 죽이고 본이를 바라본다.
본이는 읽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 또한 대단히 좋아한다. 읽은 것이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법이다.
처음에는 시월이에게만 들려주던 것인데 어쩌다가 새 책이 들어오면 청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아마도 시월이가 아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랑하면서 일이 이렇게 돼버린 것 같았다.
소문나지 않게 조심조심해서 지금까지 무사한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가 소설책을 없애버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야기에 빠져있는 동안 본이는 서방님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걱정되지 않는다. 본이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자 이웃에서 온 정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다. 남편 몰래 빠져나온 돌석이 어멈은 재미있는 부분에서 너무 크게 웃고 슬픈 부분에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어대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소리가 새나가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시월이의 타박에 매번 미안하다고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찬가지다. 동이 어멈이 본이에게 자꾸 심술을 부리는 것은 어쩌면 이 모임에 초대받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불꽃’은 편지를 엮은 책이라서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다지 재미있게 이야기해 줄 만한 내용이 되지 못했다. 읽을 때는 가슴 아픈 사랑에 눈시울을 적셨지만 막상 어떤 식으로 전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순간 본이는 편지들을 섞고 연결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불꽃’에 실려 있는 원전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한다.
이야기하는 본이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눈은 흑요석처럼 광채 나는 검은색으로 빛나고 입술은 혈색이 돌아 앵두처럼 촉촉한 붉은색이 돈다. 누군가 탄성을 지른다. 그게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몰입한 본이의 얼굴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러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여주인공 일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본이의 목소리는 형체가 있는 것처럼 질감이 느껴진다. 장터에서 전기수를 꽤 보았다는 돌석이 어멈도 본이에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저리가 처지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사랑에 빠진 남녀의 애상을 이야기할 때 본이의 목소리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그 억양은 또 얼마나 리드미컬한지 듣는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놓아주었다 제멋대로 주무른다. 그런데 그 끌어당기고 놓아주는 힘이 비단 자락처럼 부드러워서 다들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한다.
낭창낭창한 여자의 허리와 그 허리를 쥐는 남자의 억센 손과 뜨거운 눈빛이 모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여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멋진 남자 품에 안긴 것처럼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등장인물이 나올 때면 본이의 목소리는 잘 벼린 칼날을 휘두르는 것 같다.
부잣집 도련님인 남자는 여주인공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기생인 일화는 애인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 독약을 마신다. 독약을 마신 일화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를 때 본이의 목소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처연하다.
오늘은 시월이가 먼저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다들 참고 있던 울음을 쏟아낸다. 그 울음은 일화의 죽음 때문에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자신의 설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꼿꼿한 선비 집안에서 교육받았고 시집이라고 왔지만 남자 손도 잡아 보지 못한 채 사는 본이가 가슴 뜨거운 연애담을 어찌나 실감 나게 이야기하는지 다들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시골에서는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연애였지만 그런 게 있다는 말에 다들 선망하는 터였다.
이야기 속에서나마 멋진 옷을 입은 신여성이 되어 모던보이와 팔짱을 끼고 걷는 걸 생각하면 망측하다는 생각 이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건 본이도 시월이도 정이도 마찬가지였다. 상상 속에서의 연애는 너무 지고지순해서 차마 손대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아씨, 서방님이 오셔서 또 아씨를 그렇게 구박하며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요?”
다들 돌아가고 나자 시월이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물어본다.
“그러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겁이 난다. 친정으로 쫓겨 간다고 해도 오빠나 올케언니가 반겨줄 리 없는데 어쩌면 좋으냐? 시월아!”
이야기의 마법이 풀린 본이의 얼굴은 이제 소박맞은 시골 아낙의 모습 그대로이다. 쪽 지은 머리 하며 물들이지 않은 치마저고리 차림의 본이는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서리를 맞은 국화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