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본이는 저녁 준비를 위해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방으로 들어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오락가락 서성거렸다. 서방님이 오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쫓겨나는 것이 두려운 일인지 아닌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친정에서는 서방님이 일본으로 유학 간 것은 알지만 본이는 시부모님 사랑받으며 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쫓겨나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인지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다. 더군다나 어머님이 그 일에 대해서 사 년 간 모른 체하다가 서방님이 오신다니 갑작스럽게 치우라고 하는 것도 걱정이다.
“아씨, 방에 계세요?”
대답도 하기 전에 시월이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뛰어 들어온다. 시월이는 뭔가 신이 나는 일이라도 생긴 듯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고 있다. 그러잖아도 말괄량이 계집애가 얼굴에 뾰루지까지 나는 바람에 아주 천방지축으로 보인다.
얼굴도 눈도 동글동글한 데다 키도 작아서 저렇게 뛰어 들어올 때 보면 꼭 굴러들어 오는 것만 같다.
“아씨, 드디어 구했어요. 제가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본이는 시월이가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걸 보고 싶어 몇 개월을 기다렸던가.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으니 오늘 밤은 잠 다 자게 생겼다.
“아씨, 이거 다 읽고 저한테는 언제 이야기해 주실 거예요. 제가 이거 구한 거 알면 다들 난리 칠 텐데요. 아씨가 빨리 읽어야 이야기를 듣지요.”
본이는 마치 신성한 물건을 받아 드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사랑의 불꽃'을 받아 들고 품에 안았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이 안에 들어있을까 생각하니 지금 당장 주저앉아 책을 읽고 싶은 마음뿐이다.
본이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십 리 길도 마다치 않고 다녔다. 그런 본이를 볼 때마다 올케언니는 하나뿐인 시누이의 유난스러운 이야기 탐에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 지나치게 좋아하면 못 산다는데 아가씨는 어쩌자고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누,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오빠들에게 함부로 고자질하지 않고 감춰주어서 본이가 몰래 소설책을 읽고 전기수가 온다면 장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이야기를 더 많이 읽고 싶은 욕심에 글공부를 해서 모르는 한자가 없고, 일본말까지 읽었다. 오빠가 알면 경을 칠 일이라 자신이 일본말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시월이 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시어머니 오 씨가 치우라고 종용한 것은 이야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본이가 지난 사 년 동안 모은 소설책들이다. 본이가 화초장 안에 옷 대신 채워놓은 소설책들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들이다.
따로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돈 생길 구멍 없는 만석꾼 집 며느리가 시골에서 구하기 어려운 소설책들을 사 모으느라 갖은 고생을 다 했다.
동이 어멈 모르게 날마다 쌀을 한 줌씩 퍼냈고 그걸 시월이가 몰래 내다 팔거나 직접 책값으로 치렀다. 그걸 누가 알기라도 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으니 언제나 조심 또 조심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게 실은 부처님 손바닥을 헤매던 손오공처럼 시어머니 시야 안에서 놀았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묵과했다면 차라리 내놓고 책 살 돈을 얻어 낼 것을 그랬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어머니 오 씨는 실제로는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가끔 그런 시어머니가 현명한 배려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능구렁이처럼 사람 숨통을 천천히 죄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새 책에서는 마른 종이 냄새와 석유 냄새가 난다. 이건 태양일까? 표지에는 동그란 원 앞에 고개 숙인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여자일 것이다. 시월이가 방물장수한테 웃돈까지 줘가며 몰래 부탁한 것이다.
서방님은 본이에게 너 따위가 연애나 사랑을 알 턱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한 소리였다. 본이는 시집오기 전부터 구소설, 신소설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몰래 신문까지 구해 읽었다.
신문에는 남녀가 한 잔의 커피를 시켜 둘이 나누어 먹는 낯 뜨거운 연애의 풍경들이 실려 있고는 했다. 아직 외출할 때 장옷을 걸치고 남녀 칠 세 부동석을 강요받는 현실 속에 살지만 일찌감치 경성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벌어지는 연애담을 모두 읽었던 터였다.
그러니까 서방님이 이야기하는 연애가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으니 그저 '사랑의 불꽃'을 품에 안고 두근거리는 그 감정이 연애려니 싶었다.
밖에서 시월이를 부르는 동이 어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본이가 왜 나오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것이다. 본이와 시월이가 재빨리 책을 화초장 안에 집어넣고 서둘러 나갔다.
“시월아, 서방님이 오신단다.”
“네?”
부엌으로 향하는 시월이의 눈은 아씨에 대한 연민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강물처럼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