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두려워하던 일

만석꾼의 며느리와 아나키스트

by 은예진

장연수는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성에서 공부하는 동안 기생들과 어울려 놀아 볼만큼 놀아 보았고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이화여고보에 다니던 여학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결정해서 자신도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여학생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목침을 집어던져 자신의 이마에 상처까지 냈다.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일본 유학을 겨우 승낙받았다. 연수의 생각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저 계집애였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 아직 솜털도 못 벗은 저 계집애만 아니었으면 자신이 단발머리 여학생과 결혼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장연수가 술을 병째 들고 마신다. 반은 옷자락 위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너, 잘 들어. 내가 너 때문에 일이 꼬여서 결혼은 했지만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일주일만 여기 있다 일본엘 갈 거고 그다음엔 바이, 바이야. 참 너 바이바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구나. 바이바이는 사요나라, 안녕이라는 소리다. 난 애인이 있다고. 아 참! 너 같은 촌년이 애인이 뭔지 연애가 뭔지도 알 턱이 없지. 너, 남자 여자가 팔짱 끼고 다니면서 이 뭐냐 서로 러브를 주고받는 거 이런 거 모르지? 나는 그걸 원해요. 그걸! 그런데 이따위 알록달록한 옷이나 걸치고 앉아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계집애랑 뭘 하라고! 어림도 없다. 어림도 없어.”


장연수가 본이의 용잠 끝에 달려있는 뒷댕기 자락을 손으로 툭툭 쳤다. 본이는 순간 그 손가락 끝을 깨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장연수는 그렇게 온갖 트집을 잡으며 경성에서 공부한 자신과 격이 맞는 않는 계집애인 새신부에 대한 타박을 늘어놓다가 잠이 들었다.


이부자리도 아닌 맨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였다. 본이는 자신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지금까지 본이는 서방님이 일본으로 유학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돌아간 친정 오빠나 올케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방님이 완전히 잠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본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코끝을 찍었지만 다리는 풀리지 않는다.


올케언니는 서방님이 활옷을 벗기고 족두리를 내려줄 때 본이가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조신하게 보일지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어머니가 없는 본이에게 첫날밤 부부지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줄 사람은 올케밖에 없었다.


‘아가씨, 서방님이 불을 끄고 다리 사이로 몸을 붙여 올 때면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게 될 거예요. 그건 부부사이에 운우지정을 느끼게 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아프더라도 소리 내지 말고, 겁내지 말고 조금만 참으세요.’


올케 언니는 동그란 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부했었다.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밤마다 꿈속에서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벌어지는 꿈을 꾸었다. 경험해보지 않는 통증은 꿈에서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아픈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서방님은 본이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본이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습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은 더 두려워할 일이라는 것이다.


본이는 첫날밤 제 손으로 족두리를 내리고 활옷과 삼회장저고리, 대란치마를 벗었다.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서방님의 단령도 벗겼다. 자신의 옷을 포갠 위에 서방님의 단령과 사모관대를 올려놓았다. 초야는 본이와 서방님 대신 활옷과 단령이 치른 셈이었다.


올케 언니가 원앙금침에 얼룩이 지지 않도록 첫날밤에 깔고 자라고 마련해 준 면포를 접어 구석에 감추고 서방님을 끌어다 뉘었다. 스무 살의 남자치고는 몸이 가벼워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 며칠동안 내내 그런 식이었다. 장연수는 부모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서는 첫날밤을 제대로 치른 새신랑처럼 연기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장연수의 호통에 물러났던 하인들은 다시 모여들었고 그들은 도련님이 새색시에게 모욕을 주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물론 그 하인들은 도련님이 좋아하는 여학생과 혼인을 시켜달라고 조르다 이마가 깨졌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시어머니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이미 본이의 얼굴에서 첫날밤 소박맞은 새색시의 표정을 읽었다. 본이의 얼굴에서는 첫날밤을 제대로 보낸 새색시의 부끄러운 그러면서도 상기된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무언가 미로 속에 들어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만 보였다. 하지만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할 일이 그 일이었다.


시어머니 오 씨는 천연덕스럽게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며느리에게 아이라도 점지되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장연수는 마이산에 있는 칠성사 부처님께 백일치성을 드려서 낳은 외아들이다.


칠성사 스님은 연수가 스무 살 이전에 결혼을 시키면 제 명을 살지 못할 사주라고 했다. 그래서 본이가 열두 살 때 혼인을 결정하고도 몇 년을 기다린 것이다.


장덕순은 아들의 결혼이 남들보다 늦은 데다가 유학까지 가는 마당이니 손주를 언제 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며느리가 만약 그 사이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주기라도 한다면 정말이지 업고 다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장연수는 일주일도 채우지 않고 경성에서 약속이 있다며 오일만에 집을 떠났다. 떠날 때까지 그가 본이에게 한 말이라고는 자신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본이는 매몰찬 서방님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갓 시집온 열여섯 살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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