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by 은예진

아이를 키우면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 중의 하나가 그림책이나 애니메이션에 감정이입을 깊게 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이야기일까? 아이보다는 읽어주는 부모를 위한 이야기 같은데?라고 느낄 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그림책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면 내가 아이를 낳아 이런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쓴 무루(박서영)는 아이도 없는 비혼인데 어떻게 그림책에 빠지게 되었을까? 아직 비혼이 흔치 않던 시절 자신이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선택을 지지해주지 않았다. 존중받을 수 없는 결정을 한 그녀가 의지할 곳은 오직 책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만난 셸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과 ‘떨어진 한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는 이가 빠져 슬프지만 혼자 행복하게 잘 사는 동그라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림책이 주는 깊은 위로는 무루를 홀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을 위로받았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받은 위로를 나누기 위해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를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과 멀어질 수 있는 한 최대한 멀어진 중년의 내가 다시 그림책에 관심을 보일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같이 책장을 넘기며 상상의 나라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손녀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고르기 위해 읽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아직 우리 아기가 너무 어리다. 이 그림책 에세이는 나를 위해서 읽었다. 무루가 인용하는 그림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이 비혼여성이자 고양이 집사이며 프리랜서에 채식지향주의자인 그림책 읽는 어른, 무루는 서슴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의 이야기는 언제나 솔깃하다.


무루는 다나카와 슌타로가 쓰고 와다 마코토가 그린 ‘구덩이’를 통해 삽질의 역사를 고백한다. 구덩이의 주인공이 남들의 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구덩이를 파고 도로 메우는 것처럼 무루도 하등 인생에 도움 되지 않은 일들을 숱하게 했다. 열일곱 살에 했던 무용, 대학 들어가서 했던 밴드, 글쓰기 교실에서 교재 만들기,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 차 마시기, 채식하기 등등이었다. 그중에 하나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루는 삽질이라고 했다.


‘구덩이’의 주인공 히로는 삽질을 하며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아프고 귀 뒤에서 땀이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커다란 애벌레가 구덩이 아래쪽에서 기어 나왔다가 다시 흙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고 흙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맡았으며 벽에 생긴 삽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구덩이 속에서 히로는 삽질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무루 또한 자신이 몰입했던 그 삽질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었는지 고백한다. 순수한 몰입을 해본 사람은 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구덩이에서 나온 싹을 자신이 키우고 있음을 말이다.


무루처럼 비혼에 중년인 일본의 여성 작가들의 책을 몇 권 읽었다. 그네들은 무루와 비슷하게 고양이를 키우며 정갈한 삶을 살고 있지만 적정한 선을 넘지 않고 자신들의 감정 깊은 곳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무루는 단정하고 부드럽지만 일본 작가들과는 비교되지 않게 뜨겁다. 왕따를 당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 결혼하라는 성화에 이혼을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보러 다닌 선과 독거노인이 될 거라는 두려움 섞인 기대를 풀어놓는다.

하루는 나이 듦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 나의 동생이 토로했다.

‘노인이 돼서 꼭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나? MZ들 특징으로 이해되는 초개인주의를 왜 노인이 하면 아집이고 괴팍스럽다고 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그렇다. MZ들은 이해해 주기 위해 책도 읽고 이해 못 하는 사람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면서 노인들은 비난만 받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동생의 고민은 자신이 좋은 노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고집스럽게 나만 옳다고 주장하며 나이 들어가는 사람은 동생 같은 고민을 하지도 않는다. 무루도 그런 고민 끝에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노년의 삶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은 호기심, 유머, 품위라고 했다. 이렇게 고상하게 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은 골프를 든다. 골프는 같이 칠 수 있는 세 명의 친구와 돈과 건강이 있어야 하므로 노년에 필요한 것은 골프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무루는 좋은 습관을 가진 노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더 유연한 사람, 덜 편협한 사람, 더 성실한 사람, 덜 후회하는 사람,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사십 대인 무르는 그림책 속의 아름다운 할머니들을 보며 조금 설레며 기다린다. 할머니가 되는 날을.


이미 가족 내에서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할머니라는 계층으로 편입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양쪽 입꼬리가 아래로 쳐져서 심술 맞아 보이는 할머니가 아니라 상냥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새로운 것에 흥미를 잃지 않고 스스로 해보려는 마음가짐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누군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감사하게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로 답이 나온다. 할머니도 사람이고 노년도 일생의 한 시기 일뿐 결국 사람이다. 지금 사는 모습이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무루가 좋은 습관을 가진 할머니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칫 게을러지기 쉬운 프리랜서 독신자의 삶을 잘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게 결국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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