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이 드는 존재

멋진 주름을 만들어 가는 여자들

by 은예진

고금숙, 김하나 외 7명 지음 /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펴냄


갱년기가 시작되던 십 년 전 나는 심신의 혼란을 극복하게 도와줄 책을 찾고 싶었다. 도움 될 정보를 찾아 헤맸지만 갱년기 극복 방법은 너무 간단해서 책으로 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산부인과에서 여성 호르몬제를 처방받으면 끝!이었다. '힘들면 여성 호르몬을 드세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병력 때문에 여성 호르몬은 처방받을 수 없으면서 죽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내가 갱년기를 넘어서서 이제 노년을 향해 가고 있는 요즘에서야 오십 대를 위한 책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그다지 읽을만한 가치 있는 책이 별로 없다. 가르침은 교만하고 조언은 뻔했다. 더군다나 책 제목에 나이를 언급하는 것들은 대부분 장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경우가 많다. 책도 팔아야 하는 물건이니 마케팅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으나 솔직히 나이를 내세운 책 치고 그다지 좋은 책을 보지 못했다. (나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왜 그렇게 인기를 끌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인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가 '인생 후반전 길목에 서서'라는 카테고리로 글을 쓰고 있다니 누워서 침 뱉는 꼴이다. 도움 되는 콘텐츠가 별로 없음에 아쉽지만 그래도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이었고 마땅한 걸 찾지 못해 연재를 이주나 쉬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우리, 나이 드는 존재'는 아홉 명의 사십 대에서 오십 대까지의 언니들이 (잘생기면 오빠고 멋있으면 다 언니다.)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가르치지도 않고 조언도 하지 않으며 그냥 주머니에서 심드렁하게 꺼내서 테이블에 툭 던지는 것이다. 나는 안 해봤지만 소지품 미팅 같은 거다. 각자 자기 소지품 하나씩 꺼내놓고 상대방이 고르면 오늘의 커플이 되는 것처럼 그네들은 자기 삶에서 중요한 것 하나씩을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그걸 고르는 것은 이제 우리 몫이다. 여러분은 손바닥을 비비며 고를 준비를 하시라. 나는 이미 골라 잡았다. 뭘 골랐냐고 물어보신다면 나중에 알려주겠다.


번역가 정수윤은 물고기가 되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수영을 내놨다. 인간이 육체에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나는 수영을 하면서 내게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정수윤의 수영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여성학자 정희진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로 수영과 운전을 꼽았을 때 주변 사람들이 겨우 그거냐며 웃어서 당황했다고 했다. 수영과 운전은 겨우 그거가 아니다. 이미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나도 정희진과 마찬가지로 수영과 운전을 하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날 때가 있었다. 뒤늦게 운전은 하지만 아직까지 수영을 배우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부실한 몸을 가지고 직장을 다니는 내가 수영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십 년 전쯤이면 어떻게 해볼 텐데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정수윤의 수영 예찬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정수윤은 시간의 파도를 넘어 더 오래 좋아하는 일을 하고 더 길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면 운동을 하라고 권한다. 그녀가 수영을 하듯이 말이다. 대신 나는 접근성이 좋은 동네 주변을 한 시간씩 걷는다. 어지간한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무조건 신발을 신는다. 저녁 공기를 가르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경사진 길을 걷노라면 내 오장육부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두 번째는 에세이스트 김하나가 호기심 연마하기라는 제목으로 나이 들면서 필요한 덕목으로 호기심을 내놓는다. 책과 가까웠던 교사인 부모님이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본 김하나는 호기심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오십이 넘으면서 조개처럼 딱딱한 껍질 속에 숨어 버렸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해 가는 것에 불만을 표현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15년 동안 오직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 한 권만을 읽었다. 그랬던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는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갔고 호기심을 잃지 않았으며 76세에 '즐거운 어른'이라는 책을 펴내 11쇄를 찍었다. 안주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비록 느린 걸음일망정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 김하나는 그것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알맹 상점 대표 고금숙은 해마다 새롭게 죽을 결심이라는 제목으로 나이 들어가는 이에게 필요한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내놓았다. 논픽션 작가 김희경은 숲에서 홀로 치유하는 시간과 올바른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미혼인데 김희경은 혼자 사는 사람으로서 가족이 아님에도 운명을 기댈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법제화를 주장하고 있다. (가족이 아니어도 법적 보호자가 가능한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녀는 홀로와 함께 그 사이 어딘가를 고민하며 우리에게 같이 생각해 보기를 권했다.


산부인과 전문의 윤정원은 진짜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앱을 통해 남자를 만나 섹스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며 그 남자들에게 성 매개 감염 검진을 요구하는 이 사람 멋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몸을 사랑하라. 좋은 섹스를 하자는 말은 현대 여성에게 꼭 필요한 정언 명령이지만 쉽지가 않다. 그 쉽지 않은 일을 제대로 해보자고 하는 산부인과 의사라니 어찌 멋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몸에 쓰는 역사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음악가 송은혜는 인생은 프랑스 춤곡처럼을 이야기하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공부되기, 식물학자 신혜우는 사랑을 돌려주기 시작할 때를 말한하다. 마지막으로 예술 사회학자 이라영은 사라지는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에 대해 말하며 '듣기'의 중요성을 내놓는다.


우리, 나이 드는 존재로서 운동도 호기심도 죽음에 대한 고민도 모두 중요하지만 나에게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호기심'을 고르겠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 호기심에 기인한다. 그 책이, 그 사람이, 그리고 거기가 궁금하다. 죽을 때까지 궁금한 것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죽음 이후에 대해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호기심 많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새로운 일이나 물건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서 알아내는 할머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요즘은 자꾸만 겁이 난다.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레 겁을 먹게 된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호기심을 갉아먹고 있다. 이걸 하고 또 아프면 어쩌지? 내 마음 깊은 곳에 그런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계속 되뇐다. 아파도 된다. 아플까 봐 무서워서 아무것도 안 하면 마음이 아파진다. 어차피 그게 그거다. 그럼에도 불안은 곰팡이처럼 습기를 타고 늘어난다. 아쩌면 너무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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