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쿠오스마넨 감독, 2021년 작
남편은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한 번 스친 사람도 얼굴을 기억해 내고 아는 체를 한다. 고향에 살 때는 그런 남편의 능력 덕분에 어딜 가나 인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항상 반기고 악수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랬던 남자가 고향을 떠난 뒤 더는 자기 능력을 쓸 일이 없어졌다. 인생의 한 챕터를 넘기며 그는 날개는 있지만 쓰지 않는 닭처럼 살았다.
나이 들었다고 그 능력이 퇴화한 것은 아니어서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데 한번 본 영화 속 외국 배우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본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이 생긴 노란 머리 파란 눈인데 남편은 얼굴 인식 기능으로 어디선 본 배우인지 알아본다. 내가 영화 '6번 칸'을 보고 있는데 소파에 앉은 남편이 중얼거린다.
'그 야한 영화에 나왔던 어리바리 러시아 배운데.'
여 주인공 라우라가 열차에 타서 6번 칸에 들어간 순간 마주한 남자를 보고 남편이 한 말이다. 나는 미처 그 남자 배우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남편은 그가 '아노라'에 나왔던 애니한테 쩔쩔매기만 하는 어리숙한 러시아 남자 이고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6번 칸'을 먼저 검색하고 남주인 유라 보리소프를 다시 확인한 후에야 그가 이고르였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항상 바보 취급하는 남편에게 있는 이 능력은 특기 인가? 특기란에 사람 얼굴 인식 능력이라고 쓰면 남들이 인정해 줄까?)
'아노라'의 이고르와 '6번 칸'의 료하는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숀 베이커 감독이 '6번 칸'을 보고 유라 보리소프를 '아노라'에 캐스팅했다고 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터프한 건 똑같지만 미국식 상남자가 아닌 러시아식 상남자는 조금 더 순박하고 진정성이 있지만 자신감은 부족해 보였다.
핀란드에서 모스크바로 유학온 고고학 전공자 라우라는 사랑하는 연인 이리나의 아파트에 있다. 라우라가 나중에 료하에게 모스크바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아파트에 대해 묘사하기를 층고가 높고 오래된 아름다운 가구들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말한다. 그곳에 사는 문학교수 이리나는 장소에 걸맞은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즐긴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화려한 삶을 사는 이리나에게 라우라는 대체 가능한 연인이었다. 감정의 추가 라우라에게 쏠려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라우라와 이리나는 같이 무르만스크로 암각화를 보러 가기로 했지만 이리나는 다른 일정이 생겼다며 라우라를 혼자 보낸다.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 까지는 열차로 2,000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라우라는 이리나 없이 혼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리나는 그녀를 쫓아내듯 암각화를 꼭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열차에 오른 라우라는 이등 객실로 들어서고 거기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무식한 남자와 동석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같이 타는 객실칸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침대가 있는 밀폐된 이등 객실에서 낯선 남자와 둘이 며칠간 여행해야 하다니 보는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라우라도 도저히 그 남자와 같이 무르만스크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승무원에게 돈을 내밀며 바꿔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듯 무시했다. 이제 방법이 없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전화를 받은 이리나는 설마 돌아오는 거 아니지? 라며 라우라를 밀어낸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무례하고 짜증 나는 남자와 같이 한 객실에서 마주 보며 2,000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한때 영화판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었다는 김영하 작가가 말하기를 영화는 소설보다 확실한 문법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두 시간 사이에 변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작할 때 등장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통해 끝날 때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영화 '6번 칸'은 그 문법에 충실하다. 라우라는 이 짜증 나는 남자 료하를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남자는 눈치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며 친한 척을 한다. 핀란드어로 '사랑해'가 무엇이냐고 묻는 료하에게 라우라는 '엿 먹으라'는 말이라고 대답한다.
무르만스크까지 기나긴 여정중 하루를 정차하는 곳에서 료하가 라우라에게 동행하자며 주접을 떤다. 거기 가면 당신이 좋아하는 만년 전에 그렸다는 그 암각화처럼 늙고 오래된 이가 있으며 고양이가 있고 장작이 타는 난로가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거절하던 라우라는 이리나가 받지 않는 공중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뒷사람에게 봉변당하는 것을 구해준 료하의 차에 올라타게 된다.
라우라가 도착한 곳에는 료하의 말대로 정말 고양이와 할머니가 있었다. 료하는 술을 마시다 먼저 잠들고 할머니는 라우라에게 네 안에 있는 여자 동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해준다. 네 속의 여자 동물과 친해져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은 이리나에게 휘둘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라우라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늦었다며 허겁지겁 출발하는 료하는 자동차의 시동을 키가 아닌 전선을 이어 붙이는 것으로 건다. 라우라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료하를 보지만 그 시선이 전날과 사뭇 다르다.
료하와 라우라 사이가 친근해질즈음 이방인이 등장한다. 라우라와 같은 핀란드 여행자가 승무원에게 쫓겨날 상황에 처한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의 객실로 데리고 들어온다. 료하는 라우라가 자신들 사이에 엉뚱한 사람을 끼워 놓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내 심통을 부린다. 라우라는 그런 료하의 태도에 당황하지만 타국에서 만난 핀란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 여행자가 떠나고 나서야 라우라는 모스크바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그가 훔쳐갔다는 것을 알게 돼 당황한다. 어쩌면 이것으로 라우라와 이리나의 관계는 정말 끝이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르만스크 도착을 앞두고 료하와 라우라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파티를 위해 식당칸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라우라가 료하의 자는 모습을 그려놓은 노트를 찢어준다. 그림을 받은 료하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뒤섞인다. 라우라는 료하에게 자신의 모습도 그려 달라고 청한다. 그림을 그려 연락처를 써달라고 하자 료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무르만스크로 광부 일을 하러 가는 료하는 섬세한 필치로 자신을 그려준 라우라, 돌멩이인지 암각화인지 모를 무언가를 보러 2,000킬로를 가는 이 배운 여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버렸다. 차마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남자는 기차에서 내렸다.
먼 길을 달려 무르만스크까지 온 라우라 앞에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겨울에는 암각화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2,000킬로미터를 달려온 라우라에게 무르만스크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때 나타난 료하는 라우라에게 그 돌맹인지 뭔지 보러 가자고 앞장선다. 겨울에는 갈 수 없다고 하자 그는 다들 게을러터져서 그런 거라며 라우라를 채근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정말 눈보라 치는 바다를 건너 암각화에 도착한다.
만 년 전 그림을 그렸다는 암각화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바닷가 바위였고 료하의 말대로 돌맹인지 뭔지 하는 말이 딱 어울렸다. 어렵사리 도착한 그곳에서 라우라는 웃음을 터트린다. 눈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료하와 뒹군다. 그리고 확실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는 이리나의 연락에 목매는 모스크바의 주변인이 아니었다. 료하의 할머니가 말한 내면의 여자 동물을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료하는 자신이 일하는 일터로 돌아가며 라우라에게 쪽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 그 종이에는 서툰 솜씨로 그린 라우라의 얼굴과 그녀가 가르쳐준 사랑해인줄 아는 엿 먹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 쪽지를 본 라우라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라우라를 돌아보며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료하의 복잡한 눈빛과 다르게 라우라는 충만하게 웃는다.
아노라에서 애니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길 바라던 이고르는 6번 칸에서 라우라를 위해 태풍 속에 배를 띄웠다. 나에게 이 투박한 러시아 남자는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다음 영화에서는 남편이 없이도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라우라가 기나긴 여정을 통해 어렵사리 암각화에 도달했지만 그 암각화는 실소가 터질 만큼 별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라우라는 여정을 함께한 료하 덕분에 주변인으로 존재하던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해 보면 막상 그 자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진짜 얻는 것은 그곳에 가는 도중 겪는 일을 통해 깨우치게 되는 것들이다. 꼭 암각화까지 가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은 뒤늦게 소상공인이 되어서 얼굴 인식 기능을 다시 쓰고 있다. 한 번 온 손님도 반갑게 알아보고 기억해 준다. 손님들은 그런 남편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