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기록
감독 : 마이클 맥고완 , 캐나다
알리슨필, 사라가돈, 메어 위닝 주연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오만했던 시절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럴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지 왜 죽느냐고 말했었다. 그건 정말 턱없이 오만한 소리였다. 이후에 내가 아무리 땅을 파고 또 파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던 시간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살아서 아무 의미가 없는 날들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약을 먹고 일주일 만에 그 어둠이 걷히는 것을 보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캐나다 영화인 '나의 사소한 슬픔'은 작가 미리암 토우스의 원작 소설 'all my puny sorrows'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중년의 남자가 기찻길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기차를 마주하고 서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그는 극 중 욜라와 엘프의 아버지다. 재산을 종교 공동체에 헌납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의문만 남긴 채 자살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큰딸 엘프는 피아니스트로 성공해서 연주 여행을 다니며 다정한 남편과 살고 있다. 반면 18살에 임신해서 결혼한 둘째 욜라의 삶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글을 쓰는 작가지만 최근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어 괴롭기만 하다. 남편과 결혼 생활 중 바람을 피워서 별거 중인데 이혼 서류에 사인은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들과 의미 없는 섹스를 한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욜라는 엄마에게 전화를 받는다. 부러울 것 없는 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허겁지겁 고향인 위스펙으로 달려간 욜라는 엄마에게 손목을 그어 피가 낭자한 곳에 엘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병원에 있는 엘프는 공허한 눈빛으로 제발 자기가 죽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욜라와 엄마 로티는 엘프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제발 살아서 나의 언니 자리에 있어 달라고 사정하는 욜라의 절박한 심정을 엘프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자매 사이지만 그 사랑으로는 엘프의 삶을 유지시킬 수 없는 것이다.
남편과 엄마 몰래 자신을 스위스에 데려다 달라는 엘프의 호소는 욜라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화가 난 그녀는 엘프를 낙하산에 태워 북한에 떨어트려 보면 어떨까 하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극한 환경에 떨어지면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하는 소리였다. 여기서 나도 허튼소리를 하자면 손예진이 나온 '사랑의 불시착'에서 윤세리는 죽기 위해 스위스에 갔었다. 하지만 존엄사를 거부당하고 다시 돌아와 낙하산을 타고 북한에 떨어진다. 거기서 죽고 싶은 마음 대신 사랑을 얻는다. 우리나라 로맨스코미디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지만 캐나다 영화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인공의 헛소리인 것이다.
스위스에 가서 존엄사 하기를 희망하는 엘프가 욜라에게 호소하는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희망을 느끼기도 해. 해가 뜬 걸 보고 오늘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하늘은 늘 어두워지잖아. 변하는 건 없지 미래에도 같은 실망을 반복적으로 느끼게 될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나한테 그 이외의 미래는 보이지 않아.'
그 텅 빈 순간을 맞이하면 삶은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엘프의 말대로 메비우스의 띠처럼 한없이 반복되는 허망함 속에 부유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나는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떠올렸더랬다. 고독사를 했거나 자살한 사람의 집을 청소하는 김완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죽음의 자리를 뒤처리 하는 일은 단순하게 고역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내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물 안락사용 근육 이완제를 쓴다면 어떨까? 송아지 분만줄로 목을 매면 어떨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곧 내가 끼치게 될 수많은 민폐 앞에 사그라진다. 잘하는 것이 별로 없는 내가 그래도 그중 잘하는 일이 견디는 것이다. 숱하게 많은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나는 견디기로 했다. 견디고 있기는 하지만 엘프의 그 막막한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몇 번이나 화면을 되돌려 엘프의 고통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꼭 살아야 하는 것일까?
동생에게 스위스에 동행해 달라는 청을 거절당한 엘프는 갑자기 약을 잘 먹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다. 주치의는 엘프를 퇴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욜라는 엘프가 정말 좋아진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퇴원을 반대했지만 의사는 그녀의 청을 무시했다. 엘프는 피아노가 있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아름다운 집으로 돌아갔다. 더는 욜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욜라가 염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엘프는 남편을 도서관에 심부름을 보내고 혼자 기찻길로 나갔다. 거기서 아빠와 똑같이 죽음을 맞았다. 욜라는 끝내 언니를 구하지 못했다. 피아노는 적당히 치고 담배 피우고 살 좀 쪄서 살라고 좀 살아 보라고 소리 지르던 욜라는 무력감에 눈물을 터트린다. 그때 엄마 로티가 말한다.
'슬픔을 놔주기 위한 고통은 슬픔의 고통보다도 더 괴로운 법이야. 하지만 그래도 나아가야만 하지.'
로티는 그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패배의 기록이다. 비록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욜라가 언니 엘프가 언제가 보내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한 구절을 떠올린다.
'우리 시대는 비극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앙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그 폐허에서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서 작은 희망을 품는다. 이는 힘든 일이다. 미래로 향하는 순탄한 길은 더 이상 없다. 몇 개의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
로티와 욜라, 그리고 욜라의 딸은 그렇게 살아낸다.
떠난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견뎌내고 살다 보면 또 작은 일에 큰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 찾아온다. 내가 살아서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나는 빠져나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우월함을 느낄 일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평화를 찾은 것이다. 엘프는 더 이상 공허한 눈빛으로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누구도 패배하지 않은 것 일수도 있다.
얼마 전 남유하 작가가 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었다. 남유하 작가는 말기암 엄마가 희망하는 존엄사를 위해 스위스 다그니타스에 신청서를 넣었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로 쓰이는 그린 라이트가 다그니타스에서는 존엄사를 허가하는 서류다. 남유하 작가의 어머니 조순복 님은 그린라이트를 받았고 스위스로 향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마조마했다. 병원에서 영문으로 된 진료 기록부를 요청할 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칠 때, 비행기를 탈 때 혹시라도 존엄사를 위해 스위스로 향하는 것이 들켜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독자는 조순복 님의 고통이 이제 그만 끝나기를 바랐다. 그 책을 본 나는 엘프가 아무리 호소해도 스위스에서 그린라이트를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프는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겉으로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엘프가 얼마나 아픈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받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제목은 (책의 영문 제목과 동일하다.) 새뮤얼 콜리지의 시에서 인용했다. 그 시를 엘프와 욜라가 같이 읊조렸다.
나에게도 자매가 있었다
딱 한 명의 자매가
그녀는 날 사랑했고 난 그녀를 소중히 여겼다
그녀한테 내 사소한 슬픔을 전부 토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