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지키다

by 은예진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열린책들에서 나오는 문학서적을 펼치면 시작하기가 망설여진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대부분의 열린책들의 소설들은 틈이 없다. 빡빡한 글씨와 두께가 결코 쉽지 않은 독서가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는 듯하다. 623페이지짜리 '그녀를 지키다'를 앞에 두고 이걸 과연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스마트폰에 절여진 나의 뇌는 잠시도 집중을 못하고 이리저리 튀는데 기껏해야 쇼츠 보는 시간 동안이나 멈추는 눈동자가 이걸 읽는다고? 시작은 하였으나 이야기에 진입하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왜소증의 어린 소년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는 석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살던 이탈리아인인 아버지는 1차 대전에 징집되어 전사하고 만다. 엄마는 열두 살의 미켈란젤로를 삼촌이라고 했지만 실은 비탈리아니 집안에 빚이 있어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알베르토에게 보낸다. 어린 미켈란젤로를 가엾게 여긴 카르모네가 동행한 기차 여행은 길었고 그들은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내려 짐마차를 타고 피에트라달바로 향했다.


알베르토도 아버지와 같은 석공이었다. 그는 왜소증인 미켈란젤로에게 당황해 그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어머니가 보낸 돈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라고 불리기 싫어 남들에게 미모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는 왜소증 소년이 피에트라알바에 정착했다. 알베르토가 공방을 옮기며 떠안게 된 소년 비토리오와 미모는 온갖 잡일을 하며 급료도 받지 못한 채 두드려 맞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미모의 아버지가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때 그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정말 이름에 걸맞은 예술가가 될 줄 말이다. 이야기는 늙은 미모가 사그라 디 산미켈레 수도원에서 죽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모의 죽음 앞에서 수도원장은 지하에 유폐시켜 놓은 미모가 조각한 피에타 석상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한다. 미모가 마지막으로 만든 피에타 상은 세상 사람들에게 경외와 경악 혼란을 안겨 주었고 바티칸에서는 그 피에타상을 비밀리에 수도원으로 옮겨 영원히 격리시켰다. 소설은 그 피에타 상이 만들어지기까지 긴 세월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펼쳐놓는다.


미모의 삶은 곧 그녀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와 헤어지는 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에트라달바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오르시니 가문에 조각상 보수를 위해 갔던 날 미모는 지붕에서 떨어져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비올라 오르시니를 만난다. 전날 무덤가에서 우연히 만나 미모를 기절시켰던 귀신인 줄 알았던 여자. 그녀는 오르시니 후작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였다.


집안의 무관심 속에 홀로 자유를 누리던 비올라와 미모, 그리고 비토리오와 그의 쌍둥이 엠마누엘레는 묘지에서 만나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비올라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소녀였고 비토리오와 엠마누엘레는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날개를 만들었다. 성당의 피에타 상을 보고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할 만큼 눈이 예리하고 천재성을 가진 미모는 알베르토 대신 조각을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비올라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훔쳐내 온 책들을 미모가 읽으며 그들은 우주적 쌍둥이가 되었다. 감히 어울릴 수 없는 공주님과 미모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비올라의 나이가 열여섯 살이 되자 오르시니 가문에서는 그녀를 여드름 투성이 애송이인 에른스트와 결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날 밤, 비올라는 비토리오와 쌍둥이가 만든 날개를 달고 성에서 뛰어내린다. 날아올랐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얼마나 다쳤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미모는 알베르토의 심부름이라며 피렌체로 떠난다. 알베르토는 미모를 피렌체에 있는 석공방아에 팔아 버린 것이다. 미모는 그곳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초반의 이야기다. 이 고비를 넘어야 소설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진입이 만만치 않아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내듯이 읽어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밀고 나아가는 순간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는 왜소증 천재 석공인 미모에게 빙의되어 있었다. 미모는 결국 세간에 인정받는 스타가 되었으며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받아 예하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기도 했지만 그 추락이 또한 미모의 삶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비올라가 있었다.


더는 대리석 조각 안에서 형체를 보지 못하던 미모가 엄청난 사건을 겪고 다시 조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작이 피에타였고 피에타는 미모의 모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피에타에 담긴 엄청난 기운을 이기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피에타의 예수가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 아는 순간 모든 답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은 거기에 있다.


책을 덮자 피로감이 밀려왔다. 나는 마치 전생체험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켈란젤로 비탈아니가 되어서 팔십 평생을 살아낸 기분이었다. 나는 결코 될 수 없는 천재의 삶을 이렇게나마 경험할 수 있다니 이것이 문학이구나 싶다.


미모를 알베르토에게 보낸 뒤 이십 년 만에 어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그때 미모는 어머니를 향해 왜 나를 버렸느냐고 소리쳤다. 미모의 어머니는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단 한번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재현한 문학에서조차 되돌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고 그리하여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선택의 경로를 문학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문학의 등장인물들은 결국 우리와 똑같은 이유로 절망한다. 삶은 유한하고 한번뿐이니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그르다.


소설의 말미에 피에타를 완성한 미모 앞에 그의 옛 스승 메티가 미모와 똑같은 아이를 데려온다. 미모는 그 아이에게 말한다.


' 잘 들어라. 조각한다는 건 아주 간단한 거야. 우리 모두, 너와 나 그리고 이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 훼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그 이야기에 가닿을 때까지 켜켜이 덮인 사소한 이야기나 일화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는 거란다. 그 이야기에 가닿은 바로 그 순간 돌을 쪼는 일을 멈춰야 만 해. 이해하겠니?'


'그녀를 지키다'를 쓴 장바티스트 앙드레아는 자신의 소설 쓰기를 조각에 빗댄 모양이다.


책장을 덮자 비로소 꿈에서 깬 듯 정신이 든다. 아직 여름이었다. 멀리서 매미 소리가 들리고 있었는데 미처 듣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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