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넥스트 도어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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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 틸다 스윈튼, 줄리안 무어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출간 기념 사인회를 하는 자리에서 지인을 만나고 그녀가 옛날 직장 동료이자 친구였던 마사(틸다 스윈튼)의 소식을 전해준다. 잉그리드는 마사가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말에 즉시 병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한때 청준을 같이 보냈지만 어느 순간 소원해진 친구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대단히 탐미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줄리안 무어의 붉은 입술, 그녀가 입은 버건디색 코트, 쨍한 자주색 자동차.... 마사와 잉그리드가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 이질 적이다. 병원 창문 밖으로 핑크색 눈이 내리고 마사의 집은 강렬한 색채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마사가 죽음을 위해 빌린 숲 속의 집은 또 어찌나 근사한지 저런 곳이라면 죽음조차 아름다우리라는 환상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사의 죽음은 아름다웠다. 수영장에 접한 일광욕 베드에서 노란색 슈트를 입고 빨간색 립스틱을 칠한 채 죽어 있는 마사의 모습은 그 집 벽에 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보였다. 호퍼의 그림을 보고 정교한 위작이라고 말하던 마사의 말대로 그녀의 죽음은 너무 아름다워서 가짜처럼 보인다.


자궁경부암 3기로 항암 중이던 마사는 암이 전이되었다는 말에 더 이상 치료받기를 포기하고 안락사를 선택한다. 종군기자출신인 그녀는 다크웹에서 안락사 약물을 구입했고 잉그리드에게 자신이 죽으러 가는 길에 동행을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죽음에 관한 불합리성을 이해하기 어려워 최근작에서 그에 관해 다룰 만큼 죽음이 두렵다. 그런 잉그리드에게 죽음의 동반을 부탁하다니 마사의 요구는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안락사 약으로 흔히 쓰이는 펜토바르비탈은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는 약품이지만 부검 결과 펜토바르비탈이 검출되는 시신이 일 년에 열건 이상 있다고 하니 사람들은 어디선가 재주껏 약품을 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스위스 다그니타스에서 펜토바르비탈을 물에 타서 초콜릿과 함께 제공된다고 하는데 그 사망 원인은 호흡근 마비라고 한다. 호흡근 마비라면 결국 숨을 쉬지 못해서 죽는 건데 근육 이완제와 같은 방식 아닌가 싶다. 근육 이완제를 통한 안락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고통스럽다고 우리 수의사가 말해서 실망했는데(나는 왜 실망한 걸까?) 자연사가 아닌 이상 죽는 순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죽는 사람은 고통 따위 두렵지 않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 고통이 두려워 죽는 건데 어떻게 고통을 겁내지 않을 수 있을까?


안락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머릿속은 산만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가득 찬다. 잉그리드는 결국 마사의 청을 받아들여 그녀와 한 달 동안 같이 살 집으로 들어간다. 마사는 한 달 안에 열려 있던 방문이 닫히면 자신의 계획이 실행된 것이라고 했다. 이주쯤 지난 햇살 좋은 어느 날 그녀는 잉그리드가 옛 연인을 만나러 나간 사이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옆 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은 필요 없었다. 마사는 충분히 혼자 죽어갈 수 있었다.


마사가 죽고 마사와 똑 닮은 딸이 잉그리드를 찾아온다. 잉그리드와 마사의 딸 미셸이 일광욕 베드에 누워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수영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 병실 창밖으로 내리던 핑크눈이 색을 바꿔가며 내린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그 장면이 계속된다. 나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화면에 내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줄리안 무어와 틸다 스윈튼이라니 생각만 해도 비주얼이 완성되는 영화였다. 태생적으로 귀족의 아우라를 가진 틸다 스윈튼은 영화 '아이 엠 러브'에서 그 우아한 아름다움의 끝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서 검은색 점프 슈트에 벨트를 맨 모습은 마른 몸에 큰 키를 부각하며 중성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틸다 스윈튼과 같이 60년 생인 줄리안 무어는 나이에 걸맞은 경륜과 지적인 분위기를 가진 배우다. 두 사람이 격돌하고 어우러지는 장면을 보며 죽음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씁쓸했다.


영화는 스스로 자인하듯 에드워드 호퍼의 정교한 모작같이 아름다웠다. 잠시 그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나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의탁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죽는 순간 옆방에 있어 달라 부탁하는 것을 보고 남편이 배우자도 아닌데 저건 무리한 부탁이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통증을 참고 있었다. 그에게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나는 배우자인 당신에게도 그런 부탁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통증을 참으면 같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속 미움을 쌓는다. 어쩌면 통증을 호소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원하던 죽음을 죽게 되는 것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죽음은 산자의 것이지 죽은 자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사의 죽음은 마사의 것이 아니라 잉그리드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란 프라이도 할 줄 모르는 남편에게 너 때문에 내가 죽을 수 없다고 신경질을 낸다. 남편은 계란 프라이는 못해도 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응원한다. 그 응원에 힘입어 그래도 칠십까지는 버틸 거라고 응수한다. 아들들이 군대 가면 이혼할 거라고 노래하던 손윗동서가 이혼을 하지 않아 내가 볼 때마다 놀렸다. 내가 칠십을 넘기고 살아 있으면 아마도 놀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놀림쯤은 받아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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