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좀 했으나 기본 성향이 요령피우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오직 좋아하는 옷을 사러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걸음이 언제나 천근만근이다. 나는 성실했으나 뭐든 중간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집중력을 가졌으며 결정적인 순간 임계점을 넘을만한 근성이 없다.
생활지능마저 떨어지는 영점오생 같은 남편과 이번 생은 처음 같은 내가 만나 자식을 하나 낳았는데 운이 억수로 좋아서 우리 부부가 조합할 수 있는 최대치의 딸을 얻었다. (아멘, 나무관세음보살, 할렐루야) 딸은 이번 생이 삼생쯤 되어 보이는데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화는 스무 살 때였다.
수능 수리과목을 만점 맞은 딸은 시험이 끝나고 나서 대학 입학 할 때까지 수학 과외가 정신없이 들어왔다. 친구 동생이나 내 지인의 자녀, 하다못해 중학교 때 프랑스로 유학 갔던 친구가 돌아와 갑자기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 친구는 유학 가기 전에 자기가 돌아오면 너한테 수학 과외를 받을 테니 그리 알라고 하며 떠났었다는데 딸은 그 말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단다. 중학생 때까지 공부는 뒷전으로 놀기만 했던 딸인데 그 친구는 딸이 수리 만점을 맞을지 어찌 알았는지 선구안이 있는 모양이었다.
방학 내내 과외를 해서 번돈을 입학하자마자 번개처럼 써버린 딸은 어차피 학교 수업 내용은 이해도 하지 못한다며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딸은 특이하게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평균 이하의 이해력을 보여서 주변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든다. 그런데 일단 시작하면 마치 로켓을 점화시킨 것처럼 솟구쳐 오른다. 고등학교 들어가 처음 접한 물리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자 당시 남자친구가 붙들고 집중 과외를 해줬는데 결론은 남자친구보다 딸이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 정시로 대학을 간 딸이 하도 어리바리하게 구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너 농어촌전형으로 들어왔냐고 물을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딸은 아니거든 나, 우선전형으로 붙었거든 하고 외쳤다.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니고 놀 때지만 놀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욕심껏 돈을 쓰려면 알바를 해야 한다고 딸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과외는 하기 싫었고 사무직 알바는 재미도 없었다. 학교 졸업하면 평생 사무직을 하며 살 텐데 굳이 지금부터 책상에 매이기 싫었던 이 청춘은 청춘의 알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뷔페식당 알바였다. 북유럽식이었나 핀란드식이었나 하여튼 앞에 생소한 이름이 붙은 뷔페였다. 처음에는 주방 잡일로 시작했다가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좋아서 테이블 안내 스텝으로 승진했다며 자랑했었다.
뷔페에는 연예인급 잘생긴 매니저 오빠도 있었고 조선소에서 알바를 해봤다는 오빠의 이딴 건 일도 아니라는 썰도 들을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청춘들이 모여 땀 흘리는 자리의 낭만이 있었다. 환경이 급격하게 바뀐 탓에 오는 대학 신입생 특유의 우울감도 땀을 흘리다 보면 잊을 수 있었다.
그런 딸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당시 딸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 종종 언급하며 감탄했다.
"알바하면서 느낀 건데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혼날 때 그 일을 가장 빨리 수습하는 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거야."
스무 살 아이의 처세에 반생 짜리 남편과 일생 짜리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멈추며 '대박'을 외쳤다. 너는 정말 이번 생이 처음은 아니구나.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혼내는 윗사람에게 구구절절 늘어놔봤자 혼나는 시간만 길어진다는 걸 알지만 절대 실행하지 못하는 우리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디서 저런 게 나왔을까 감탄했다. 시원찮은 우리 부부가 뽑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춘의 알바를 끝낸 딸은 겨울 방학 들어서며 공부를 시작했고 삼 학년 때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세무사를 거쳐 로스쿨을 졸업하고 김앤장에 다닌다는 선배를 롤모델로 삼았지만 그 선배와 비싼 밥을 먹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무사는 김앤장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경력이었고 선배는 별로 추천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어쩌다 보니 세무사 자격증은 입사할 때 가점 10프로 받은 거 이외에는 쓸 일 없는 회사에 취업해서 신입사원 연수 때 만난 동기랑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청춘의 알바를 할 때 평생 책상에 앉아 있을 텐데 지금부터 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말대로 팔목에 보호대를 차야 할 만큼 무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사무직의 직업병은 목과 어깨, 손목이 망가지는 거라며 투덜대는 삼십 대가 되었다.
지난 주말 딸네 가족이 수도권에 있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남에서 먼 길을 달려왔다. 돌이 지난 아기는 딸바보 아빠에게 전횡을 휘두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엄마를 출근시킨 후에 아빠가 맨 아기띠에 매달려 문화 센터를 다니느라 다리가 발갛게 그을려있다. 고등학교를 기숙학교로 가면서 내 손을 빌려본 적 없는 딸은 그 먼 곳에서 온전히 남편과 둘이서만 아이를 키우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딸은 돈 많은 남자도 전문직 남자도 아닌 가정에 헌신적이고 자기가 가진 본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딸은 밀린 업무를 놔두고 퇴근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사위는 집에 가서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부서원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위는 기꺼이 내가 아이의 주양육자가 될 테니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육아 휴직 중이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 비관적이 되고 싶어도 이 세 사람을 생각하면 비관적일 수 없다. 그들의 행복은 내가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저 받은 축복이자 은총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면 최소한 나로 인해 균열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내가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실려갔던 날,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찾지 못해 당황한 남편은 어린애처럼 딸에게 전화해 훌쩍거렸다. 그러니 나는 이 반생짜리 남자를 거두고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도시에 가서 살고 있는 딸과 인연이 닿을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닌 사위를 생각하면 뻔한 것 같지만 예측 불가한 우리네 삶은 재미있다. 보들보들하고 오동통한 손녀의 팔다리와 흥이 나면 들썩이는 엉덩이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던 영역의 문을 열어주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은 손녀의 웃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웃음이 많은 손녀는 영상 통화를 하면서도 활짝 활짝 웃어준다. 앞으로 살다 보면 또 어떤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만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렇게 크레바스 위에 단단한 건널목 하나를 올려놓는다.
@ 알바의 여왕 번외 편
딸은 공부하는 와중에도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알바를 했다. 학교 선배 자녀의 과외를 하다 그 선배 눈에 들어 오래도록 시달렸다. 선배는 회계법인을 퇴직하고 개인 사무실을 차렸는데 딸에게 자기한테 와서 일하라고 하도 졸라대서 거절하느라 고생했다. 김앤장 다니는 선배를 소개해주며 삼십만 원짜리 밥을 사주기도 했다.
취업 준비하다 공부가 지겨워진 딸이 결국 선배의 꼬드김에 넘어갈까 싶은 순간 이모가 개인 사무실은 절대 아니라며 말리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이모는 사위를 볼 때마다 그때 내가 말려서 너를 만난 거라고 큰소리친다. 선배는 취업 이후에도 언제 퇴직할 거냐고 문자를 보내고는 했다. ㅋㅋ
별의별 알바를 다했지만 그중에 최고봉은 하루짜리였다. 공부가 지겨운 날이었던가 식품가공업체의 단기 알바 공고를 보고 일당이나 벌어오겠다며 나갔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승합차가 왔다. 시키는 대로 타고 가니 공장인데 위생복을 입히고 들어가라고 하더란다. 들어가 보니 육가공업체였다. 당황한 딸이 이게 식품가공이냐고 하니 담당자가 그럼 고기가 식품이 아니고 뭐냐고 했단다. 결국 고기를 갈기 시작한 딸이 내가 갈리는 건지 고기가 갈리는 건지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옆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소곤소곤 "학생, 어쩌다 이런델 왔어. 내일은 나오지 마." 그럼에도 담당자는 내일도 나오면 안 되냐고 쫓아다녔다. 남편이 나 같았으면 당장 도망쳤을 거라고 했지만 딸은 그래도 그날 하루를 채우고 모두를 웃게 만드는 에피소드와 육만 원을 들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