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마음

by 은예진

열두 번의 체크인 / 김미라 지음 / 니케북스 펴냄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내 눌러 놓았던 감정이 이렇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아루릴 시술을 하면서도 통증은 계속됐다. 통증을 호소하자 소변, 혈액 검사를 했지만 임의적으로 항생제를 먹고 있던 탓에 염증 수치가 나오지 않았다. 항생제를 먹으면 통증이 가라앉고는 했는데 이제 약을 먹어도 염증 수치 없이 통증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미 전에 항생제가 듣지 않는 상황을 경험한 나는 지금 먹고 있는 세프틸이 효과 없게 되는 걸 가장 걱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걱정은 현실이 되어 항생제를 먹어도 통증이 계속됐다. 이제 별 도리없이 그냥 참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참았더니 염증수치가 나오겠다 싶은 증상이 느껴졌다.


소변검사로 염증 수치가 높자 피검사를 하고 조영제를 투여한 CT를 찍고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항생제를 정맥으로 다시 맞기 시작했다. 혈관이 좋지 않은 나는 모든 과정에 바늘을 두 번씩 찔러야 했고 왼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조영제 쇼크를 경험했던 탓에 겁이 났지만 이번에는 무사했다. CT를 찍는 동안 조영제가 들어가는 팔을 계속 올리고 있어서 어깨부터 팔목까지 너무 아팠다. 그리고 발이 헛놓일만큼 어지러웠다. 출근을 포기하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진으로 소통하는 SNS는 주로 과시용으로 쓰인다. 명품 가방과 차키를 찍어 올리고 해외의 아름다운 리조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텍스트 기반 SNS는 조금 더 내밀한 속마음이 드러나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는 듯 앞다투어 자신의 불행을 털어놓는다. 거기에는 온갖 병과 이별과 실패가 난무한다. 어린아이가 항암 부작용으로 온몸의 피부가 벗겨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세상에는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고 내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남의 쇠 짐보다 내 솜 짐이 무거워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집에 들어와 침대 위에 오른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수액은 림프절이 있는 왼쪽으로만 맞을 수 있고 몸은 전정 신경이 망가지지 않은 오른쪽으만 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옆에 놓은 김미라 작가의 '열두 번의 체크인'을 집어 들었다. 그건 정말 큰 실수였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다.


'열두 번의 체크인'은 KBS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의 김미라 작가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를 여행한 여행기였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진행했던 여행자의 노트 코너를 쓴 여행들을 모아 방송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고 있다. 나지막하면서도 몽환적인 전기현의 목소리와 여행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겹치는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꿈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나는 지금 무너진 상태였고 김미라 작가는 내가 이번 생에는 절대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에서 감격하고 있었다.


시칠리아를 거쳐 체팔루로 간 그녀는 체팔루 성당이 보이는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자 노르만 왕조의 대성당과 그 앞 광장의 초록빛 파라솔이 접혀 있는 풍경, 밤새 비가 다녀갔는지 촉촉한 광장의 바닥, 그리고 텅 빈 오른쪽 골목의 고요가 잠깐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이토록 우아한 숙소에서 두 번의 밤을 보냈다. 아침 식사는 지붕 위에 차려졌다. 카푸치노를 만들어 올라오니 빵과 과일과 레드 오렌지 주스와 요구르트가 작은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시월이어도 한낮엔 여름인가 싶게 더웠지만 흐린 아침엔 제법 쌀쌀했다. 스카프를 두르고 앉았다. 눈앞엔 대성당과 로카가, 왼쪽엔 지중해가 한가득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행복한 아침인데 커피와 크루아상과 과일마저 다 맛있었다.


김미라 작가가 카푸치노 잔을 들어 올리며 행복하다는 말도 굳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녀의 감동 앞에서 나는 지독한 소외감을 느꼈다. 지금 상태라면 나는 이탈리아 같은 곳은 가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 했어야 하는 일들이 감자 넝쿨처럼 줄줄이 올라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부서진 마음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나를 찔러댔다.


신춘문예에 당선될 즈음 그러니까 마흔이 조금 넘었던 시기에 나는 문창과 대학원이 가고 싶었다. 소설 창작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그깟 대학원은 뭐 하러 가냐고 일갈했지만 나는 공부해서 스펙을 만들고 조금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변변찮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항상 그만둘 궁리만 했다. 나만 보면 그만둘 이유를 빌드업하느라 징징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그만두면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느꼈다. 그의 징징거림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되니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그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삶에서 한 학기에 수백만 원씩 드는 대학원을 다닐 여력이 없었다. 그가 수입이 적어도 책임감이 조금만 있었다면 나는 대학원을 가고 지금 사는 집을 떠나 신축 아파트로 이사할 욕심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에 산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가며 소설 강좌를 들으러 이주에 한 번 강남으로 다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성 중앙 로맨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고 상금으로 천만 원을 받았다. 전년도 상금이 오백만 원이었는데 당시 여성 중앙이 삼성에 삥을 제대로 뜯어 상금을 배로 올렸다. 그리고 그 오른 상금을 내가 받았다. 세금 떼고 구백칠 심 만원 가량이 통장에 들어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차를 사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돈을 고스란히 아파트 대출금을 갚는데 썼다. 신춘문예 상금을 받았을 때도, 얼마 되지 않는 암보험금을 받았을 때도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그리 살아서 노후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빚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지만 그 선택을 만족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내가 선택한 삶에 후회 없이 살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떠났던 체팔루의 해변도 추억의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배경인 프랑스의 몽생미셸을 뒤로하고 걸을 수 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아파졌다. 애초에 그런 건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세상을 잃은 듯 노여워졌다. 이번 생은 아플 일만 남은 것만 같은 분노가 항생제로 향했다. 그놈의 항생제만 없었다면 나는 벌써 신장까지 번진 염증으로 죽었을 텐데 그럼 어차피 희망 없는 이번생은 빨리 끝내버렸을 텐데. 모든 건 항생제가 잘못한 거다.


아스라한 기억 속의 '라스트 콘서트'에서 어린 나는 스텔라만 봤는데 김미라 작가 때문에 스텔라 뒤에 있는 몽생미셸을 봤다. 김미라 작가 '덕분에'라는 말을 썼다가 '때문에'라는 말로 바꿨다. 김미라 작가가 쓴 나의 시칠리아, 나의 노르망디, 나의 토스카나라고 하는 말들을 보며 질투에 빠진 나는 덕분에라는 말을 쓰기 싫었다. 하지만 김미라 작가라고 언제나 즐거운 여행은 아니었다. 그리스에서 그녀는 무언가 마음에 짐이 무거웠고 절벽 위에 놓인 의자를 보며 나쁜 마음 먹기 딱 좋은 자리라고 썼다. 하지만 곧 나쁜 마음을 없애기에도 딱 좋은 자리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에게해를 바라보며 울 수 있는 그 의자가 나에게도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노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부지런하게 아침마다 병원 주사실에서 정맥 항생제를 맞고 출근한다. 주사실 간호사가 좋은 혈관을 찾았다며 기뻐한다. 그 혈관 터지지 않게 관리 잘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한다. 나는 그 혈관을 애지중지 지키느라 삼분 지혈을 착실히 하며 주사실을 나온다. 무너진 마음은 좀처럼 일으켜 세워지지 않는다. 나아지는 듯싶던 통증이 다시 느껴지면 갑자기 식탁 너머 베란다 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발작 같은 충동을 느낀다.


방광은 공포와 관련이 깊은 장기이다. 영화에서 흔히 공포스러운 상황에 맞닥트린 등장인물들이 소변을 지리는 것은 방광이 공포에 반응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광에 문제가 생기면 심리적으로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간질성 방광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지난 이 주간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50프로가 그렇다고 답한다. 통증과 상관없이 무너진 마음은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동아줄을 붙들듯 루틴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칭을 하고 저녁을 먹으면 한 시간씩 걷고 씻고 나면 림프 마사지를 한다. 이럴 때 보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루틴이지 싶다. 산만하게 흩어지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루틴대로 간다. 루틴을 지키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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