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립미술관

전쟁과 평화 : 삶의 서사

by 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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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 삶의 서사> 전 2025. 11. 28 ~ 2026. 2. 22


양평군립미술관을 방문하기 전날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공격해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 체포했다. 군인포함 4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상자 숫자는 계속 바뀌고 있다. 휴전 상태인 분단국에 살면서도 전쟁에 대해 무감하게 살던 나는 가장 최근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쟁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고 그 여파는 애꿎은 민간인들에게로 향한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추는 경험도 해 봤으니 전쟁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을 것 같다. 인류가 살아가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권력과 자원을 향한 탐욕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살던 전쟁의 상흔을 예술작품으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내가 가장 훌륭한 전시를 기획하는 미술관으로 손꼽는 양평군립미술관에서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전쟁과 평화 : 삶의 서사>라는 제목의 전시를 마련했다. 25년 상반기 <한국 현대 구상미술의 단면 : 사실과 재구성전> 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알찬 전시였다. 양평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23 RCT와 프랑스대대가 중국군에 승리를 거둔 지평리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번 전시는 치열했던 '지평리 전투'의 흔적을 더듬으며 전쟁과 이후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미술 작품에 실어 보았다.


경기문화재단이 경기도 예술인 지원정책인 '예술인 기회소득'을 지원하는 예술인들의 최근작 및 주요작을 공개하는 전시가 '본업本業'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는데 네 번째 전시로 양평군립미술관에서 <전쟁과 평화 : 삶의 서사> 전으로 열리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PDF리플릿을 제작해 큐알코드로 다운로드하여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을 자세하게 읽을 수 있다. 전시장에서 읽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작품을 보고 돌아와 리플릿을 보며 작품을 복기하면 전시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전시 세션은 총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전시 세션을 어떻게 나누어 서사를 입히는가가 전시의 질을 좌우한다. 내가 지난번 양평군립미술관에서 본 <한국 현대 구상미술의 단면 : 사실과 재구성전>의 세션 구분과 흐름을 보면서 전시에 서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쟁의 상흔으로 시작해 평화를 구하는 마음 그리고 전쟁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서사에 걸맞은 작품의 흐름을 만들었다.


1. 전쟁과 마주하다 Facing War


3일 새벽 150대의 전투기가 베네수엘라 상공을 날았다. 일상에서 이렇게 쉽게 전쟁을 볼 수 있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미술 작품은 어떤 식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전쟁은 이제 역사가 아니라 현실로 우리 곁에 있다.



1.선무,리념사냥.jpg 선무, 리념사냥

전시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마주친 작품이 선무작가의 '리념사냥'이다. 탈북작가인 선무는 북에 있는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자신의 모습이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언제나 뒷모습뿐이다. 리념 사냥 속 하단의 검은 붓질은 물고기다.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모습은 서로를 구분 짓고 공격하는 군중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 그림만 볼 때는 환하고 아름다운 그림인데 알고 보면 평화롭지 못한 혼돈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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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람 시체들 4


이보람은 테러로 희생된 6세 이하 어린이들의 시체를 그림에 담아내고 그 혈액양을 계산해 같은 양의 빨간 물감으로 붉은 그림을 그린다. 어른들의 탐욕에 희생된 아이들의 피가 그림이 되는 현장은 관람객의 정수리가 쭈뼛해지는 충격을 느끼게 한다.


이외에도 K9 자주포를 양복과 넥타이 셔츠 등으로 구현해 낸 '부드러운 K9' 검은 연기가 올라가는 듯한 조형물 오혜린의 '위기라 불리우는' 등이 인상적이다.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인간 탐욕의 민낯을 드러내며 관람자에게 과연 너의 삶은 안전한가 묻고 있다.


2. 흔적을 탐하다 Tracing Traces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 앞에 선다. 파괴된 세상, 망가진 몸, 갈라진 영토처럼 눈앞에 보이는 흔적과 휴전 상태를 지키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군대와 그 군대에서 흘러나오는 위계질서, 서로에 대한 의심 등 비물질적 흔적이 교차돼서 긴장감을 형성한다. 우리 삶에 스며든 전쟁의 흔적 그로 인한 불안을 살펴보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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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8사로

김창환이 군복무 시절 직접 경험한 사격훈련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번호가 매겨진 여덟 개의 숫자는 실제 군에서 사용한 사격 훈련용 과녁이다. 낮은 포복으로 총을 쏘는 군인들의 모습과 귀가 터질듯한 총성이 들리는 듯한 작품이다. 젊은 청년들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군대에 가서 18개월 동안 단체생활을 하며 전쟁을 준비한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삐뚤게 생각해서 병역 거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너무 자연스럽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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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완 보색대비- DMZ


우리 땅에 남긴 전쟁의 가장 큰 흔적은 DMZ다. 그래서 DMZ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에 볼일이 없었던 이 장면이다. 예전에는 너무 자주 여러 매체에 등장해 내가 마치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1976년 도끼만행 사건의 현장이다. DMZ를 상징하는 이 장면은 여전히 긴장감을 높이는 힘을 가졌다. 흑백 필름 속 장면을 보는듯한 그림에서 우리가 현재 어떤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는지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다.


3. 평화를 만들어가다 Towar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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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병 '가이아의 게르니카'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가 후퇴하고 있던 게르니카에 독일군이 폭격을 퍼부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피카소가 파리에 머무르던 시절 그를 감시하러 온 게슈타포가 게르니카의 복제품을 보고 당신이 그린 그림이냐고 묻자 '아니, 당신이 한 거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육근병의 '가이아의 게르니카'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작품 중앙 상단에 보면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소녀는 2022년 우크라이나 키이우 방공호에서 '렛 잇 고'를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아멜리아다.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린 소녀의 '렛 잇 고'에 위로를 받고 희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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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경 '소금'

황정경은 이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되는 상태를 꿈꾸었다. 때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이 사치스럽게 여겨질 때도 많지만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름다움을 통해 지어지선止於至善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치유의 이미지를 가진 소금으로 바다 생물을 구현해 낸 작품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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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삼 REDDREM

2022년 8월 8일 유엔의 공식 문서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희생된 민간인 사망자 수를 5401명으로 집계했다. 전병삼은 그 희생자수와 같은 5401장의 종이를 접어 작품을 만들었다. 접은 종이에는 우크라이나 거리에서 찍은 붉은색 양귀비 사진이 찍혀있다. 작품 옆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전병삼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붉은 눈물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고정된 진혼곡이다.


4. 일상을 살아가다 Living The Everyday


전쟁을 거쳐 그 참상의 흔적을 지나 평화를 구해 찾은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 우리는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낸다. 지금 이렇게 여기에 서 있는 일이 얼마나 기적 같은 것인지 되새겨본다. 영화 '돈룩업'에서 지구 종말을 앞둔 사람들은 결국 사랑하는 이들과 식탁에 앉는다.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그 일상적인 행위가 실은 인간이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일상은 지켜져야 한다.


4.아단향, 향기로이불어오는바람바람꽃바람.jpg

아단향 '향기로운 바람 바람꽃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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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님 '그곳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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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수 '별과 새의 노래'


아단향은 낙원을 꿈꾸고 김동님은 자연 속에서 평화를 찾으며 류희수는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고요를 꿈꾼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상'에 가치 기준이 있을까? 개인마다 가진 시간의 값이 다르다. 벌금을 노역으로 내는 노역형의 경우 허재호 전 대주그룹회장은 하루에 5억 원의 일당을 탕감받았다. 일반인은 노역으로 탕감받을 수 있는 벌금이 하루 10만 원 정도다. 노역으로 따지지 않아도 연봉을 시급으로 계산한 고액 연봉자와 최저 시급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5억 원짜리 일상도 10만 원짜리 일상도 똑같이 지켜져야 한다. 세상이 내 일상에 대해 어떤 가치를 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먼저니까 말이다. 아단향의 '닿을 수 없는 낙원의 향기' 속에는 푸른 물가에 흰색 물새가 날고 키 작은 꽃이 가득하다. 우리 일상이 그럴 수 없으니 아단향은 닿을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내 일상이 낙원은 아니지만 어딘가 한 귀퉁이에서 커피 향 정도는 맡을 수 있으리라. 오랜만에 아내의 미술관행에 따라나서 남편과 카페라테를 마시며 겨울 강 풍경을 본다. 팔당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돌아오는 길 햇살에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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