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by 은예진

카미유 주노 지음, 이세진 옮김 / 윌북 출간


19.5 X 23.5 크기에 340페이지, 중량은 대략 1.5킬로 정도 나갈 것 같은 책을 실물로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이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책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걸 일주일 동안 들고 출퇴근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고 다녔다. 독서의 흐름을 중단하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니 갖가지 핑계를 대며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다. 바쁘다고 연락하지 않는 남자는 나에게 반하지 않은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어지간한 난항은 모두 극복하기 마련이다. 일요일 새벽 4시에 잠이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간 나는 소파에 담요를 덮고 웅크리고 앉아 이 책을 다 읽었다. 1267년에 태어난 조토 디 본도네를 시작으로 1990년대 생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뱅크시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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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미술관 기행을 시작하며 조금씩 그림 보기에 재미를 붙였다. 전에도 미술 관련 도서를 많이 읽기는 했지만 읽을 때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소소하게 가까운 미술관부터 시작해서 그림을 보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그림과 전시를 이해하는 요령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관을 다니기만 하면 전시실을 나오는 순간 다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미술관 관람기를 쓰기 위해 그림 제목을 적고, 팸플릿을 챙기고 작가와 작품에 대해 검색하면서 그림만 보고 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얻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가장 공부를 많이 하게 되는 사람은 저자이듯 브런치 북에 미술관 관람기를 쓰며 독자와는 상관없이 글쓴이인 내가 제일 많은 소득을 얻었다.


요즘 나의 정체성은 미술관 여행자라고 공공연히 떠드는데 이런 나를 위한 책이 눈에 뜨이다니 당장 읽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책의 규모에 그만 주눅 들고 말았다. 백여 명에 가까운 화가와 엄청난 크기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아, 이 책은 그때그때 전시회에서 만나게 될 화가를 미리 찾아보는 용도로 써야 하는 거구나. 다 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거구나라는 식으로 슬쩍 도망치려다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 책은 화가 한 명 한 명 그림 하나하에 집중하는 책이 아니라 흐름을 익히는 책이다. 화가별로 한 페이지는 그림, 나머지 한 페이지는 화가와 그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기껏 한 페이지에 화가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정말 화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으면 차라리 위키디피아나 나무 위키를 찾아보는 것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읽으며 깨달았다. 이 책 '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은 백여 명의 화가를 통해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더불어 그 화가의 대표작을 조금 꼼꼼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독서의 부담은 사라지고 저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의 흐름을 탈 수 있게 된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영원한 회화에서는 서양 회화사를 개척한 초기 이탈리아학파의 화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르네상스 화가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얀 반 에이크,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뒤러 등이 이 시대에 속해있다. 나는 이 시대 화가 중에 1450년 생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을 보고 경악에 가까운 감탄이 일었다. 틀림없이 전에 한두 번 본 그림인데 자세히 보자 마치 외계 행성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만 같았다. SF영화 속 장면 같은 이 그림이 1500년 그림이라니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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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5 X 384.9cm의 3단 제단화인 '쾌락의 정원'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압도적일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2부는 승리하는 회화 편으로 이 시기는 바로크에서 고전파까지 이르는 시기로 회화는 종교 및 정치권력이 선호하는 홍보의 도구가 되었다. 카라바조, 페테르 파울 루벤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디에고 벨라스케스, 안토니 반 다이크, 렘브란트 반 레인, 등이 익숙한 인물들이다. 이 시대 나의 눈길을 끈 화가는 네덜란드 여류 화가인 주디스 레이스테르였다. 그녀가 그린 '마지막 한 방울'은 술에 취해 풀어진 두 남자와 그들을 부추기는 해골이 등장한다. 당시 죽음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런 그림을 '바니타스화'라고 했다. 죽음의 상징을 등장시켜 삶의 교훈을 주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3부는 감각의 회화로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면서 예술이 좀 더 사적이고 감각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인물로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조지프 말로드 월리엄 터너, 외젠 들라쿠루아 등이 보인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뒷모습의 신사가 보이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그림은 워낙 유명해서 반갑기조차 했다. 내가 아는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뒷모습의 그림이다. 저자는 이 방랑자의 모습은 카스파르가 자연에 바치는 송가이자 영적 메시지라고 말한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 타는 여인의 행복한 우연' 또한 익숙한 그림이다.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타는 여인과 그네를 미는 남자, 그녀의 치맛자락 속을 보고 있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 그림을 의뢰했던 생쥘리앙 남작은 그네를 밀어주는 남자는 주교로 치마 속을 보는 남자는 자신으로 그려달라고 했는데 프리고나르가 차마 주교를 등장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그림은 틀림없이 당시의 진지한 예술을 요구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지탄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4부는 반항하는 회화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즘을 버리고 근대성, 야외, 자연광의 회화를 발명하고 더 대담한 형식의 실험을 펼친다. 귀스타프 쿠르베, 장프랑수아 밀레,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조르주 쇠라,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크 뭉크, 구스타프 클림트 등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인상파가 포진한 시대다.


이 익숙한 그림들 속에서 나는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에 꽂혔다. 익숙한 그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그림으로 보자 독한 싸구려 술에 취한 여인의 풀린 눈이 어찌나 인상적인지 놀라웠다. 나만 놀란 것이 아니라 당대에 충격을 준 그림이라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담뱃갑에 그려진 끔찍한 사진과 같은 역할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충격 요법을 써도 인간은 담배와 술을 멀리하지 못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급진적인 회화로 20세기 선배 예술가들의 경험을 밑천 삼아 사유를 추상의 경지로 밀고 나가는 현대 미술가들이 등장한다.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피에르 몬드리안,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에드워드 호퍼, 조지아 오키프, 프라다 칼로,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로이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쿠사마 야요이, 마침내 뱅크시까지.


어떤 그림은 낯설어서 호감을 느끼고 어떤 그림은 익숙해서 호감을 느낀다. 그중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익숙해서 좋다. 그 익숙한 쓸쓸함, 익숙한 건조함, 익숙한 창백함.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에 사람들은 같이 있어도 말이 없고 고독하다. 그 고독 속에 나도 스며드는 기분이다.


이렇게 긴 미술사 여행이 끝났다. 미술관 여행을 위해 '퍼블릭 아트'라는 월간지도 온라인판으로 구독 신청했다. 기왕이면 어반 스케치정도를 하며 즐기면 더 좋겠지만 아직 그럴 여유는 없다. 시간을 내 미술관에 가고 관련 서적을 읽는 정도만으로도 삶을 누리는 기쁨이 되고 있다.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큰 나날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잘 보기 위해 읽어야 할 것들이 자꾸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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