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보다 낯선 고향의 이방인
조치원역에서 내린 본이와 시월이는 사 년간 변한 고향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래 조천이라고 불리던 조치원은 사람이 살지 않던 늪지대였다. 역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목조 건물이었던 역사가 붉은 벽돌에 기와를 얹은 번듯한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이천은 경성에 가깝기는 하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골이다. 하지만 조치원은 역이 생기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수원역은 흔한 한옥의 모양을 취했지만 조치원역은 형태부터 전통적인 건물이 아니었다.
역을 나와 거리로 나오자 놀랄 일은 끊이지 않았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돌아다니고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보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역 부근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익숙하지 않은 냄새, 익숙하지 않은 말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복장의 사람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곳이 고향이 맞기는 맞는 것일까? 어디로 가야 자신이 살던 마을로 갈 수 있는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때 저만치서 자전거 한 대가 달려왔다. 이번에는 시월이도 재빨리 피해서 자전거는 쌩하니 지나간다.
본이는 자전거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자전거만 보면 또 사고가 날까 봐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을 스쳐 간 자전거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찬바람이 가슴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씨,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니다. 보긴 뭘 본다고 그러니?”
“그나저나 성빈관에 누워 있는 그 양반은 추스르고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서방님을 만나러 온 사람이래요? 하기야 이천군 내에 일본으로 유학 간 사람은 서방님밖에 없으니 양복쟁이가 서방님 찾아온 것은 이상할 것도 없지요? 그래도 그렇지 정말 신기했다니까요.”
본이는 시월이가 쫑알거리는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었지만 유성준과 장연수가 어떤 관계일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도 같이 어울릴 만한 부류가 아니었다. 유성준에게서는 장연수가 꿈에서도 가질 수 없는 대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나절을 걸어 연기면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마을은 입구부터 적막한 것이 사람 사는 동네 같지 않았다. 시댁을 나올 때만 해도 쌀쌀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춥지는 않았다. 읍내에서 며칠 머무르는 사이 날씨가 갑작스럽게 추워졌다.
본이도 시월이도 아직 솜을 넣은 옷을 입지 않아서 입술이 새파랗게 얼고 손도 곱았다. 마을 어귀를 돌아 대문 앞에 선 본이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게 반가웠다.
흙담이 군데군데 내려앉고 깨진 기왓장이 눈에 뜨였다. 몇 년 사이 더 낡고 허름해졌지만 고래등 같이 커다랗고 호화로운 시집에 비해 다정스러워 보였다.
본이는 어린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던 대문을 밀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본이는 깜짝 놀랐다. 시집 가기 전에 한 번도 잠겨있어 본 적 없는 문이다. 시골 동네에서 문을 잠가 놓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조치원의 변화는 이곳 연기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본이가 문을 두드리며 언니를 외쳤다. 어쩐지 열리지 않는 문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만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대답이 없자 시월이까지 합세해서 큰아씨를 외쳤다. 얼마나 불렀을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뉘시오?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작았지만 틀림없는 올케의 목소리였다.
“언니, 저 본이에요.”
“네? 정말 본이 아가씨란 말이에요?”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올케와 마주 선 본이는 그만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올케가 너무 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보였다.
“아가씨, 이게 얼마 만이요. 아유! 우리 아가씨 이제 정말 색시 태가 나네.”
“언니,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째 이렇게 말랐대요?”
두 사람은 손을 꼭 붙들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서로 묻기만 했다. 어떻게 친정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냐, 어찌 이리 집안이 조용한 것이냐부터 서로가 대답은 할 생각하지 않고 묻는 데 열중했다. 올케의 시선이 물어뜯어서 끝이 뭉개진 본이의 손톱에 가 닿았다.
본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손톱을 감추었다. 그때 큰오라버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문단속을 하지 않았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한 손에 자루를 들고 이러다 큰일을 겪어 봐야 정신을 차린다며 문을 닫던 오라버니가 본이를 보더니 멈칫했다.
“본이 아니냐? 무슨 일이기에 네가 여기까지 왔니?”
“저는 친정에 좀 오면 아니 되는 사람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출가외인은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네가 갑자기 오니 어쩐지 겁이 덜컥 난다. 그래 그동안 어찌 지냈느냐?”
방으로 들어가면서 살피니 오라버니 또한 올케 못지않게 마른 데다 옷차림까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부부는 모두 가장자리가 낡아서 너덜너덜한 무명옷에 버선도 신지 못한 차림새였다.
아무리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먹고살 만한 땅은 가지고 있던 이씨 집안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손인 큰오라버니 내외가 이 모양이면 작은오라버니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동양척식회사와의 이런저런 송사에 휘말려 얼마 안 되는 땅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다. 아마도 오빠가 몇 번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것이 알려져 감찰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끝에 돌아가신 조부에 만세운동까지 참여한 오라버니니 단단히 미움을 샀을 것이다. 땅을 빼앗긴 후 남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왜인과 관련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느라 가족들이 모두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가장이 되어서 가족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라버니의 눈은 무기력한 가장의 슬픔이 그대로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