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소설素雪

검은 나비

by 은예진

“좋다. 그럼 해 보겠다 이 말이냐?”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진짜 제 이야기로 승부를 볼 수 있게끔 해주십시오. 그러니 얼굴을 가리고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뭐? 기생이 얼굴을 가려?”

“서양의 가면무도회용 가면을 쓰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호라!”


행수는 가면이라는 말에 무릎을 쳤다. 그러잖아도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기생 판에 시들해하는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데 가면을 쓴 이야기 기생이 등장하면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네가 뭘 제법 아는 모양이다. 사내라는 것들이 원래 가리면 가릴수록 벗기고 싶어 안달을 하는 법. 네가 가면을 쓰고 술자리에 나서면 그 또한 장안에 화젯거리가 되겠다. 아니 그러냐?”


행수가 홍란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자 홍란 또한 슬그머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생들을 불러놓고 술을 마시면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조원구라는 사람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원래 평양 부자인데 어떤 사연인 줄은 모르나 처자식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후로 삶에 의지를 잃고 경성에 와서 전 재산을 술로 마셔 버리고 죽겠다며 날마다 태화관에 나와 산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이니 부끄러운 것도 없어서 술주정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행수는 조원구를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한지 행랑어멈을 불러 찬물을 한 사발 들이켰다.


“보다 못한 그의 친구들과 태화관 주인이 조원구를 태화관에서 데리고 나가 살림을 차리는 기생에게 포상금을 주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기생은 불러 놓고 시선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술만 마시는데 불려 온 기생은 혼자 노래를 부르다 춤을 추다 해야 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혼자 급하게 마신 술을 쉽게 취하니 그때부터 기생들에게 트집을 잡고 괴롭히는 것이 또 만만치 않다.”


“그런 인물이면 기생을 보내지 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사람 친구들이 워낙 막강한 실력자라 아무도 함부로 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거절하면 조원구와 같이 잃을 손님이 너무 많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계속 놔두면 태화관 이미지에도 문제가 있으니 태화관 사장도 우리 권번도 아주 골치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르는 형편이다. 네가 이야기로 조원구를 설득해서 돌려보내라. 할 수 있겠느냐? 지금까지 숱한 기생들이 덤볐다가 실패한 일이다.”


본이는 군말을 일절 달지 않고 하겠습니다, 하는 말 한마디만 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드디어 자신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 묘하게 흥분되었다.





“너는 아직 기생이 아니니 기생 복식도 필요 없다만 그렇다고 초라한 행색으로 요릿집을 들어갈 수 없으니 이걸 입도록 해라. 생각해 보니 네 재주인 이야기하고 잘 어울릴 수도 있겠다.”


행수가 내 준 옷은 여학생들이 자주 입는 긴 저고리에 짧은 통치마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홍란이 신이 났는지 발을 맞추어 보더니 제 구두까지 꺼내다 주었다.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통치마였지만 무명이 아니라 비단인지라 은은하게 품위 있어 보였다.


짧은 통치마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레이스 속치마를 입고 굽이 있는 검은 구두를 신었다. 머리를 풀어 서양식으로 올린 뒤 리본을 달아주자 영락없이 여학생이다.


마지막으로 명주는 나비 모양의 화려한 가면을 내밀었다. 눈만 가리는 가면은 검은색 깃털로 모양을 내고 가장자리를 공작의 꼬리털로 장식했다. 가면을 쓴 본이의 얼굴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열대의 나비 한 마리가 올라앉은 것만 같았다. 그것은 본 홍란이 감탄을 한다.


“얼굴 가리려고 쓴 가면이 도리어 얼굴을 돋보이게 만드네. 역시 형님 말대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신비해 보입니다. 사내들이 아주 궁금해서 환장하겠습니다.”


행수는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기생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요릿집엘 나가려면 이름이 있어야겠다. 네가 이야기 기생을 하겠다 했으니 소설 어떠하냐? 흴 소(素)에 눈 설(雪)이지만 음으로 치자면 네가 이야기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으니 괜찮아 보이는구나.”


본이는 소설이라는 기명이 꽤 그럴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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