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죽고자 기를 쓰는 남자

검은 나비

by 은예진



태화관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홀에서 들리는 장구 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정신이 쏙 빠지는 듯했다. 행수는 처음 태화관엘 가는 본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 같은 것은 모두 생략했다.


어차피 네가 익혀야 한다며 인력거에서 내려 태화관에 들어가면 보이나 지배인에게 조원구 나리가 불러서 왔다고 하면 된다고 했다.


화려한 가면을 쓴 본이가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제일 가까이 있는 보이에게 조원구가 어디 있는지 묻자 항상 있는 방에 있다고 대답한다. 항상 있는 방이 어디인 줄 모른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층으로 안내했다.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졸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술병에 있는 술이 줄지 않은 것을 보니 그는 아직 술을 마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본이는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방을 차단하고 자신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조원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행수에게 듣던 대로 그는 기생을 불러 놓고는 상대는 하지 않을 모양이다.


각오하고 왔던 바이다. 본이는 조용히 그의 맞은편에 앉아 요릿집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둘러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당신 기생 맞아? 들어왔으면 술을 따라야 할 것 아닌가?”


조원구가 고개도 들지 않고 이야기했다. 본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술을 따랐다. 하지만 술을 제대로 따라본 기억이 없는 본이는 술잔의 크기조차 가늠하지 못해 술을 흘리고 말았다. 술이 잔을 넘쳐 조원구의 바지 위로 흘러내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조원구가 소리를 지르며 본이 쪽을 보더니 흠칫 놀랬다.


“이건 또 뭐야? 그 가면은 뭔가?”


기생에게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라 하였는데 실수를 한 데다 가면까지 쓴 기생에게는 말을 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나 보다.


“저는 나리에게 이야기를 들려 드리러 온 소설이라 합니다.”

“뭐? 이야기?”


조원구는 아직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머리는 흐트러졌고 눈빛은 흐릿했으며 얼굴은 미라처럼 거무칙칙한 색으로 비쩍 말라있었다. 본이는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가다가는 그가 뜻 한대로 술을 마시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다른 기생들이 노래나 연주를 하거나 춤을 추는 재주를 가졌다면 저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오늘은 나리를 위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검은 나비 가면은 또 뭐야? 진짜 웃기는 기생이군. 시끄럽다. 기생 주제에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야단이야. 술이나 따르고 꺼져라.”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마신다 하셨습니까? 제가 보니 곧 그 소원을 이루시겠습니다.”


본이는 조원구에게 밀리지 않을 공산으로 세게 밀어붙였다.


“뭐야? 네까짓 게 어디다 함부로 지껄이나? 기생이 기생답지 못하게 꼴값을 떨어!”


조원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테이블보를 잡아당겼다. 와장창 소리가 나면서 술병과 음식 접시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본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조원구의 난동을 보고만 있었다.





조원구는 다음 날도 기생을 불렀다. 이번에도 본이가 갔다. 조원구는 본이를 보더니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검은 나비 너냐? 어제 그 꼴을 보고도 또 오다니 너 뭐냐?”


“제 이름은 검은 나비가 아니라 소설이 입니다.”


“시끄럽다. 얼굴에 검은 나비를 달고 나타나면서 무슨 검은 나비가 아니라고 하느냐?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냐?”


조원구는 지난밤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난동을 친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한결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저 사정이 있으려니 해 주십시오.”


“그래? 네가 아무래도 대단한 추녀인 모양이구나.”


본이가 선뜻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재미가 없는지 노래나 부르라고 손짓을 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야기 기생이지 춤이나 노래는 하지 못합니다.”


“뭐야? 돈을 주고 기생을 불렀으면 돈값을 해야지 노래도 못하고 춤을 못 춘다니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 같은 것에게는 화대를 줄 수 없으니 당장 꺼져!”


“대정 권번에서는 나리가 제 이야기를 들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저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권번을 이용하지 않으실 것이면 제 이야기를 들어봐 주시지요.”


본이의 말에 조원구가 기생 주제에 자신을 협박한다고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탁자에 있는 술병을 내던지지는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실랑이를 하면서도 조원구는 권번을 바꾸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본이와 이야기를 듣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하는 동안은 도리어 술을 적게 마셨다.


조원구는 태화관에 들어와서 오늘도 나한테 검은 나비를 보냈다가는 경을 칠 줄 알라고 보이를 협박했지만 막상 본이가 왔다 가면 보이에게 별말이 없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끝에 본이가 이야기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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