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나비
조원구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나리도 저런 친구 때문에 고향인 평양을 떠나셨나요?”
조원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떻게 고향을 떠나시게 되었나요?”
조원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이의 이야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본이는 조원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았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가족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연이어 낳은 두 딸과 막내아들이 얼마나 어여뻤는지,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아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살짝 입매가 올라가고 근육에 긴장이 풀렸다. 이어서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원인 모를 화마가 집을 덮친 것에 관해 이야기 할 즈음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중년의 남자가 흐느껴 울다가 급기야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시커먼 숯덩이가 된 아들딸을 찾아냈을 때 심정은 절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본이는 불현듯 이야기가 가진 힘은 자신이 이야기를 잘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로 하여금 상대방이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원구는 울 만큼 울고 나서야 그런데 원이는 정말 집을 떠난 것인가? 하고 물었다.
본이는 이후 이야기는 다음 날로 미루고 자리를 떠났다. 열흘 만에 원이가 노인과 영혼을 바꾸게 되는 이야기를 마쳤다. 노인은 그렇게 새로운 영혼을 만나 영생을 누리는 존재였다.
집에 남은 원이의 몸은 노인의 영혼을 담고 성장했으며 노인의 몸속으로 들어간 뒤 원이의 영혼은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리는 원이처럼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원구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아명이 ‘원이’인데 내가 어떻게 원이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후회는 원이가 모두 짊어지고 갔으니 나리는 후회하지 않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자네가 도와주겠는가?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나리, 저는 그저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까지만 할 수 있는 몸입니다. 그 이야기를 담고 나가서 새로운 이야기를 품는 것은 나리가 직접 하셔야 합니다.”
조원구는 이제 재촉하지 않고 본이의 검은 나비에 손을 올렸다. 본이는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검은 나비가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날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조원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평양엘 오거든 나를 한번 찾아오시게. 그리고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라도 연락하게.”
본이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조원구가 장난처럼 한마디 했다.
“검은 나비가 아무리 얼굴을 가려도 자태는 감출 수가 없으니 나비 따위는 소용없다고 행수에게 이야기하게.”
대정 권번 검은 나비가 태화관에서 추태 부리던 조원구를 평양으로 돌려보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더군다나 조원구는 본이에게 기생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만한 돈을 주고 갔다. 이 돈이면 애초에 계획한 대로 간호부가 되려는 공부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이의 마음이 바뀌었다. 몸을 간호하는 간호부도 좋은 직업이지만 상처받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마음을 치료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이는 예전에 의녀들을 약방기생이라 부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네가 어쩌다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게 굴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세 번이라 했으니 조원구를 성공적으로 돌려보냈다 하더라도 남은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너를 대정 권번 기생으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저 또한 처음 말씀하신 대로 시험을 거쳐 제대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좋다. 이번에는 네가 만나야 할 사람은 손님이 아니라 기생이다.”
“네?”
“소향이라는 아이다. 본디 홍란이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던 아이인데 남자 잘못 만나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부모님 허락받아 온다고 떠난 남자는 감감무소식인데 소향이는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날마다 죽어가고 있다. 사랑이 뭔지 아주 눈 뜨고 볼 수 없는데 저러다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얼마 전에 대들보에다 줄 거는 것을 행랑어멈이 발견해서 말려놨지만 언제 또 그런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네가 소향이를 설득해서 그 남자를 잊고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해 보아라. 지가 춘향이도 아니고 떠난 임 때문에 목숨을 버리면 누가 알아준다니…….”
행수가 혀를 찼다. 본이는 소향이란 기생을 만나기도 전에 목숨을 걸만큼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향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소향의 집도 다방골에 있었지만 홍란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기생들에게 월세로 방을 빌려주는 집이라고 하는데 집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외진 곳이었다. 그래도 다방골이라고 어디선가 장구 소리나 가야금 소리가 나기도 하고 <수궁가> 한 토막이 들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