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나비
옛날에 원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원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재력가여서 집안에는 항상 과객들이 넘쳐났습니다.
몰락한 양반으로 이 고을 저 고을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도 있었고, 무술이 뛰어난 협객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풍수와 역학에 밝은 술객도 있어서 정감록을 가지고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원이의 아버지는 그러한 과객들과의 교류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했습니다.
어린 원이는 종종 아버지의 사랑방에 불려 가 그 과객들 앞에서 시를 짓고는 했습니다. 그다지 뛰어난 실력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과객들은 자신들을 대접하는 주인에 대한 예의 때문에 아이에게 입에 발린 칭찬을 했습니다.
서당을 다닌 또래 아이들이 평범하게 지을 수 있는 시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원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수준을 과대평가했지만 원이는 자신이 시원찮은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방에 불려 갈 때마다 진땀이 나고 배가 아파서 곤혹스러웠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원이의 고충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원이가 손님들 앞에서 시를 짓는데 그 자리에 있던 나이 든 문객 하나가 호통을 쳤습니다. 그걸 시라고 지었느냐며 원이를 향해 화를 낸 것입니다. 다들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제일 당황한 것은 지금까지 아들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던 아버지였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누군가 지금까지 열 살 아이가 지은 시중에 이러한 시를 본 적이 없거늘 노인이 망령이 난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다들 그 말에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노인은 더는 이 비루한 인간들과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틈을 타 원이도 자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본이가 이야기를 멈추고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술잔에 넘치지 않고 팔 할을 채웠다. 맑은술이 청자 술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던 조원구가 술잔을 비운다. 본이가 한 잔 더 따른다. 본이가 또 술잔을 채우자 신경질적으로 잔을 비운다.
“그래서?”
“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술잔에 술만 따르면 다인가?”
원이가 노인을 따라 나갔을 때 그곳에는 노인이 없었습니다. 대신 영롱한 눈과 화사한 얼굴빛을 한 소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원이를 한 번 보더니 재빨리 문을 향해 나갔습니다. 원이가 소년을 잡기 위해 뛰어갔지만 한발 늦었습니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과객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원이에게는 형제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인근에는 원이와 같은 또래의 소년이 없었을뿐더러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진 원이가 굳이 친구를 사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원이의 머릿속에서는 그 소년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읽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이상하게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렸습니다. 그 소년을 따라 문밖을 나가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과객들이 머무르는 사랑채에는 아직도 원이를 질책했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노인과 마주친 원이는 그 눈빛이 낯익어 깜짝 놀랐습니다.
허옇게 백태가 낀 노인의 눈 속에 이상하리만큼 영롱한 소년의 눈빛이 들어있었습니다. 원이는 자석에 이끌리듯 노인을 따라갔습니다. 노인이 사랑채의 중문을 넘어갔습니다. 원이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소년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소년이 나가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원이가 다가가 소년에게 손을 내밀자 소년도 해맑게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았습니다. 둘은 날아오르듯 가벼운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대문 앞에 있던 머슴은 원이를 보고도 도련님이 어딜 가시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두 소년은 그렇게 날마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마음껏 놀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일인데 원이가 그렇게 돌아다녀도 가족들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높은 담 너머 바깥세상을 꿈꾸던 원이는 신이 났습니다. 다람쥐를 잡기도 하고 새 둥지를 털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가지고 놀던 새끼 새는 도로 둥지에 돌려주었고 다람쥐도 풀어 주었습니다. 머루도 따 먹고 으름도 따 먹었습니다.
힘껏 달리다 이름 모를 사람의 무덤에 누워 하늘을 보면 가슴이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그때마다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 헤어질 때마다 소년은 원이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었습니다. 사랑방 시연회에서 원이의 시가 날마다 좋아진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슬픈 얼굴로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원이는 놀라서 어떻게 자기를 두고 떠날 수 있느냐고 울부짖었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발을 구르며 같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소년은 갑자기 원이의 눈을 쏘아보며 정말 같이 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집에 좋은 음식에 좋은 부모님이 계신 이곳을 떠나 자신과 떠돌아다닐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이는 고민할 틈도 없이 당장 따라나서겠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