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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Apr 09.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가벼움과 무거움의 미학

위대한 문학에는 위대한 첫 문장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은 대표적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책의 첫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를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으로 빠뜨렸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회귀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우리가 겪은 일이 또 반복될 거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인하다. 영원한 회귀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더 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의 무거움과 가벼움일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우리의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종종 내가 무겁게 살아야 좋을지, 가볍게 살아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워하곤 했다. 어떤 태도로 사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어차피 죽고 없어질 인생이니까 또는 우리는 우주에서 먼지도 못 되는 존재이니까 되는대로, 심각하지 않게,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야 현명할까?(가벼움)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가치들을 찾아내(이를테면 사랑,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위한 투쟁 같은)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노력하며 짐을 지고 살아야 현명할까?(무거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우리는 종종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종 허무하다고도 말한다. 이 표현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반영한다. 우리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살고 있다.


삶의 무게가 우리짓누를 때면, 가벼워지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진다. 이렇게 애쓰며 버둥버둥 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한 번 사는 건데. 어차피 잊힐 일이고, 잊힐 존재인데. 천문학자들은 드넓은 우주를 탐구하다가 인생무상을 느낀다고 한다. 저 광활한 은하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의 세상인 지구조차 너무나 하잘것없이 작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말이다.


갑자기  허무해진다. 허무. 비어있다는 것이다. 비어있는 것은 가볍다. 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무거워서 괴로워하다가 이제는 가벼워서 괴로워한다. 허무함에 빠졌다는 건 우리가 의미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자기 존재의 필연성,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은 가벼움에 몸서리친다.


이렇게 의미를 잃을 때면  역시 생활의 의욕을 잃고 ‘ 되는대로 살자.’ 모드로 변해 내가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려 한다. 잘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일을 대충 하기도 하고, 잡고 있던 인간관계를 내려놓고, 사랑도 가벼운 만남으로 생각하려 한다.


이런 가벼움에 대한 동경이 요즘 시대의 트렌드인듯하다. 파르메니데스처럼 가벼운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다. 가벼운 만남, 질척 질척 대지 않는 것, 매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진지한 감정을 참을 수 없어하는 것. 쿨함이 대세다. 진지함은 오글오글이란 수식어 앞에 자취를 감추었다. 때로는 의미를 지고 살려다가, 세상의 쓴맛을 본 사람들이 가벼움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늘, 그리고 결국은 그 가벼움에서 곤란함을 느버리고 만다. 가벼움의 찬란함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 가벼움에 날아갈 듯 해방감을 느끼다가도 너무 가벼워서 곧 견딜 수 없어진다. 소설 속의 4명의 인물 역시 그렇다.




토마시는 무거움을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는 1명과 진지한 사랑은 질색하고 여러 명과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길 선호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와 진지한 관계가 되는 것, 즉 무거움은 절대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섹스 후에도 반드시 집으로 귀가하거나, 여자를 돌려보내 절대 함께 잠을 자지 않았다.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 무거움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테레자와 함께 잠을 잤고 결국 무거움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이 상황을 짐스러워했지만 테레자를 놓을 수도 없다.


어느 날 테레자는 말한다. 당신을 먼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z(토마시 친구)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고. 토마시는 운명이라 생각한 테레자와 자신의 만남이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것이 여섯 개의 우연(하필 그날 토마시가 간 술집이 테레자가 일한 술집이었다든가)이 일어나야만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기뻐하는 동시에 무거워했다. 여러 우연이 겹쳐 일어났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필연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었어!! " 우리는 가벼움을 찬양하지만 실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존재기도 하다.


우연은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어.”라는 대답이다. 우연은 가벼움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냔 말이지. 그러나 우리는 우연을 기어코 필연으로 바꿔버려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렇게 가벼움을 견디다 못한 우연이 필연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무거움에 직면한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알다시피 책임은 아주 무거운 짐이다. 무거운 짐을 피하려 도망친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다시 무거움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인생은 가볍다는 것인가, 무겁다는 것인가.

사랑은 가볍다는 것인가, 무겁다는 것인가.

페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이 가치 있다고 했지만, 베토벤은 무거움이 가치 있다고 했다.

그래야만 해? 응 그래야만 해
muss es sein? es muss sein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6번 마지막 악장에 그가 남긴 메모다. 무엇이 그래야만 했을까? 청력을 잃었음에도 자신은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자신의  악보의 모든 음과 기호, 배치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나는 베토벤의 '그래야만 하는 것'을 알 수 없으나 그의 음악에서 절대 가벼움을  느낄 수는 없었다.


사비나는 자유연애주의자다. 그녀는 토마시의 애인들 중 하나라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프란츠가 유부남인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란츠가 부인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한 것을 알아버렸을 때 그녀는 프란츠를 떠다. 그런 무거움은 그녀와 맞지 않다. 그녀는 항상 가볍고자 했다. 나는 사비나가 이런 가벼움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을까 읽는 내내 걱정이 됐다. 무거움을 불행하게 여기지만, 가벼우면 우울해하는 나와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난 후에 우울증에 걸렸다. 대체 왜? 그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어한다. 관계의 짐을 지기 싫어 떠나왔는데 그녀는 왜 우울할까? 프란츠가 자신을 따라와 질척거리며 짐을 얹어놓으려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렇다. 사비나를, 또 나를 짓눌렀던 것은 다름 아닌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무거운 짐이었다. 사비나는 너무 가볍기 때문에 무거움을 느낀 것이다. 이 문장은 나의 인생 문장이 될 것이다.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삶이 더더욱 짐스러워지는 나에게 말이다.


그래서 쿤데라는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고 말했나 보다. 모순이 비롭고 미묘한 이유는 둘 중에 딱 떨어지는 답을 고를 수 없기 때문아닐까. 과연 무엇이 현명한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멍청한 짓임엔 틀림없다. 모순은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 그래서 모순은 미묘하고 신비롭고 진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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