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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Apr 24. 2020

백설공주는 왜 문을 열어줄까.

새롭게 읽는 동화

 

우리는 기존에 익숙한 관점을 깨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이야기에 매혹된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뭐랄까 좀 멋져 보이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는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성실한 거북이를 배우자는 것이 교훈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토끼와 거북이를 접했다.  거기에선 토끼와 거북이가 사이, 함께 결승선을 통과했다.

새로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경주 시스템, 즉 왜 꼭 한 명만 1등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영상을 학부모 총회 날 학부모들에게 보여주었다. 여러분의 담임은 1등 하는 것보다 함께 갈 수 있는 능력, 협동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뭐 빤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협동이나 배려의 가치에 대해 학생들은 교과서에서나 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는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차라리 솔직하지 어른들은 위선적다.

“저도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라고 말하지만 어른들의 말과 진심은 종종 다르다.


 잠시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이 표리부동에 이골이 난다. 표면의 말과 이면의 진심 사이. 알아서 알아채고 이면의 진심을 들을 줄 아는 능력. 이것을 잘해야 사회생활 잘하는 것이라는데 나는 이것을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곧잘 캐치하지만, 곧이곧대로 들어주고 싶지 않아 못 알아들은 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인지라 보통 피곤한 게 아다.




이 책은 새로운 시선으로 동화를 읽어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가 교사라서 더 공감하며 읽었고 저자가 학교에서 모범적이지 않은 학생들을 대변해주어 좋았다. 수업시간에 자고, 거울 삼매경에 빠져있고, 치마를 줄여 입고, 공부에는 절대 관심이 없는 학생들 말이다.


동화우리가  어렸을 때 읽사실 동화의 교훈은 꽤나 정치적이다. 정치적이라는 말과 가장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영역 정치적이다. 사람들도 모르는 새 은밀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의 인식에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이다. 세뇌가 별건가, 그런 것이 세뇌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어떤 의견을 주입하려 한다 싶으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느끼고 거부감을 가진다. 그러나 동화, 설화에서 누가 그런 것을 떠올리겠는가. 동화, 설화는 아이들이 읽는 아주 순수하고 유치한 영역데.


그러니 동화만큼 순진한 얼굴을 하고 메시지를 도배하기 좋은 것도 없다. 게다가 아직 머리가 굳지 않은 아이들, 곧 자라서 사회인이 될 아이들에게 사회에 순응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동화는 아주 좋은 사회화 수단이.



학교에 가기 싫은 피노키오는 학교에 안 가고 뒷길로 샜다. 하지만 뒷길로 새는 아이의 결말이 좋을 리 없다. 피노키오는 납치되고, 팔가고, 당나귀가 되어 죽도록 일을 하고, 고래 뱃속에서 죽을 고비도 넘다. 학교를 안 가고 딴 길로 새면 받는 벌 치고 과듯싶다. 아무튼 피노키오는 결국 효자가 됐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었다.


그 동화가 만들어진 시대가 한창 근대학교가 생겨나 학생들을 학교에 가게 만드는 게 시급한 과제였던 19세기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동화는 당연히 정치적이다. 처음의 학교는 서민 아이들의 교육권을 위해서라기보다 산업혁명 시대 근로자를 길러내기 위한 필요성에서 시작되었다.


학교는 읽고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으나 지배층에게 더욱 마음에 드는 효과가 생겼으니, 바로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일제히 공부하고 쉬는 시스템의 정착이었다. 하기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것, 교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 시키는 대로 하는 것노동자의 덕목이다. 이런 덕목은 표준화된 인간 형성을 목표로 하며 여기 따르면 보상이 있다. 즉 돈을 벌어먹고살 수 있다.

   

동화에서는 항상 어른의 말에 순응하는 아이가 상을 받는다. 또 근면과 성실은 거의 최고의 가치로 칭송받는다. 게으름은 나쁘고, 어른의 말을 안 듣거나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면 개고생 한다.  공주성이나 탑에 갇혀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왕자만이 유일한 구원이 된다.



몇 달 전, 『선녀는 잠시 참지 않았다』라는 책을 들춰 본 적이 있다. (읽지는 못했다) 부제는 고정관념, 차별, 혐오 없이 다시 쓴 페미니즘 전래동화이다. 전래동화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본다 하면 나는 무조건 선녀와 나무꾼이 떠오른다. 나무꾼은 오늘날로 치면 성범죄자다. 선녀와 같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선녀와 나무꾼』을 절대 로맨스로 볼 수 없다. 오늘날 훔쳐보는 것은 불법 촬영이고 '범죄'이다. 게다가 옷을 뺏어서 결혼하고 아이를 볼모로 붙잡아 고향에도 못 가게 하다니. 나무꾼들에게 미안하지만 선녀가 나무꾼을 사랑했을 리 없다.


선녀의 경험은 나의 초딩시절 일이고 당시 그 나무꾼도 초딩이었다. 그는 내가 샤워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훔쳐보고는 내가 샤워실에서 나오자 '굳이' 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아이는 내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는 것을 알면 당황스러울 것다. 만약 지금 “ 너 그때 그랬던 거 기억하냐.”라고 물으면 몹시 당황하여 멋쩍게 웃으며 그때는 어렸고 장난이었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것이 장난이 될 수 있는 문화인 것이 문제다. 요즘 초등학교에 아이스께끼가 없는 것은 그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샛길로 샌 빨간 모자를 옹호하고, 거위배를 가른 어리석은 아저씨를 변호해준다.


지금의 큰길도 이전에는 샛길이었다. 우리는 처음 샛길을 간 사람들에게 빚지고 살고 있다. 왜냐면 그들이 처음 샛길을 갈 때 그들은 어리석은 선택이라며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인류애에 넘쳐서 사명감을 가지고 샛길을 선택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샛길이 옳다고 생각해서, 가지 않을 수 없어서 갔던 이도 많을 것이다.


정말로 궁금하다. 우리는 왜 정해진 길로 가야만 할까.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파농은 흑인은 진정한 프랑스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왜라고 질문했고 , 메리 울 크래프트는 딸은 왜 상속을 받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들은 여자와 흑인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큰길에 수긍하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는 큰길에 수긍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원래 그런 것이라거나 그래야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책은 샛길로 새보지 못하고 살았던 나에 대한 위로로 다가왔다. 앞으로마음 가는 대로 샛길로 새자는 다짐도 하게 됐다. 더불어 '왜 저럴까' 싶은 샛길로 새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지 않기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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