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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Jun 05. 2020

나는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착각

책_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이 책은 소수자들의 이야기이다. 차별과 억압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소수자란 사회적으로 힘이 없어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약자? 그런데 약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 뭘까. 장애여부? 빈곤함? 성적지향?

어떤 정체성을 말하는 것일까. 소수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소수자이다. 성별, 학력, 인종, 민족, 지역, 계급, 장애여부, 성 정체성  사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소수자가 소수자인 것, 약자가 약자인 것의 공통점은 자기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를 나로 받아주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 말이다. 나는 너와 대화하고, 너와 함께 놀았던, 네가 편견 없이 나를 대할 때의 나, 그대로의 나인데 어떤 정체성의 경우 ,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 말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길고 구질구질한 설명을 덧붙이며 내가 잘못한 게 없음을 설명해야 하는 것.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쪼그라들어 나를 변호해야 하는 것, 주류의 기분을 상하게나 하지 않을까 조심해하며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이 소수자가 겪는 일이다.


민우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어서 감춰야 하는 것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무언가 말할 수 없어서 감춰야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 필요하면서도, 드러내는 순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어렵게 되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에 정체성이라는 이름이 쉽게 붙는다. 물론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열쇳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마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착시 현상을 주의해야 한다.

     

흔히 소수자의 정체성을 비웃는 사람이 부끄러운 의식 없이 사용하는 말 중 하나는 "그렇게 당당하면 말을 하지? 왜 숨겨?"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당당하지 못해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정체성으로 낙인을 찍고 배제하기 때문에, 심지어 해고를 하는 등 생존에 위협을 주기도 하니까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위의 말 "자신 있으면 말하겠지, 자기도 창피하니까 숨기는 거 아냐."라는 말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어서 감추는 것은 다른 것이다. 창피해야 할 것은 그 말을 한 자신다.


포털 메인 기사에는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당당하게 쏟아낸 댓글들이 한 트럭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베댓이다.) 이태원 클럽 감염, 얼마 전 인종차별로 사망한 흑인 플로이드 사건. 그 기사들에는 개념 있는 척하는 차별과 혐오가 넘쳐났다.


그래 바로 이거다. 그러니까 주류의 특권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무슨 특권? 하겠지만 당당하게 차별과 혐오를 내뱉을 수 있는 것, 그러면서 자신은 합리적이고 똑똑한 줄로 믿고 있는 것이 특권이다.(진심으로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주류 정체성은 아무런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 가령, 한국인(한국에 사니까), 서울 거주(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 대학(학벌주의 사회), 직장인(취업성공), 이성애자 등은 드러내려 애쓰지도,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다. 아예 의식이 없다.


그러나 소수자의 정체성은 그럴 수 없다. 는 몇몇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억압적인지, 되도 않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는 것이 소수자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별은 나와 동떨어진, 권력자들이나 못된 사람들만 하는 그런 짓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별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고유하게 부딪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은 사라져야 할 것이지만 그/그녀들에게서 사라져야 할 것이 된다. 나는 차별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그/그녀들이 겪는 어떤 피해가 차별이 된다.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해 자주 말한다. 사람들은 대개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이유를 그들의 정체성에서 찾는다. 동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국적이 동남아이기 때문에,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에... 등등 특정한 정체성 때문에 차별이 생긴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어떤 정체성을 문제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가 그들을 다른 것으로, 잘못된 것으로 구분하는 해석이 차별이 됨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수자들은 그러한 정체성이 타고나는 어떤 속성들에 기인하는 것들도 있지만 정체성을 해석하는 사회적 인식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고 주장한다.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차별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 이 현실은 복잡한 것이다. 한 사람이 겪은 차별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사람에 따라 다른 경험이 되기도 하기에 획일화하여 말할 수도 없다.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차별은 나쁘니까 하지 말자는 앵무새 같은 소리나 반복하며 다른 사람을 차별할지도 모른다.   

   

추천 독자

1. 자신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이성적이고 민주적이고 평등을 지향하며 차별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2. 차별은 나쁘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차별은 나쁘다. 나쁘니까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차별은 그 층위가 복잡하고 현실 그 자체이기에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차별을 사전적 의미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 차별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 현실과 동떨어진 보편과 추상의 올바름을 말하며 자기 확신에 빠져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사실 위의 두 케이스는 모두 나였다. 나는 스스로 평등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차별을 반대하고,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차별을 하지 않았다고도 생각했다. 차별을 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마 나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에게 차별의 언어와 몸짓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차별인지도 모르는 더 큰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차별인 줄도 모르고 하는 나의 무신경한 말과 행동 속에서 누군가는 체념과 억울함,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세상에는 이런 소수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이런 일을 겪는답니다. 차별이지요? 나쁘지요? 우리 모두 차별하지 말아요.”라는 식으로 교훈을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의 편지는 수신확인이 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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