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어락은 얼마전부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날마다 점점 느리게 돌아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건전지가 다 되어 가는구나.' 이렇게 계속 되다간 언젠가 건전지가 0이 되어 집에 못 들어오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건전지를 갈지 않았지. '설마' 하면서.
그러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슈퍼에 갔다 집에 들어가려는데 도어락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지금 당장 짐가방을 챙겨 기차시간에 맞게 서울역에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도어락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전화를 했다. 그날은 또 하필 일요일이라 나는 간신히 직원과 연결되었고, 그에게 말로 설명을 들어가며 임시 전기를 일으켜 집에 들어갔다. 기차는 놓쳤고, 그날 즉시 나는 전지를 갈았다. 이후로 나는 도어락이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느려질 때면 바로 건전지를 교체한다.
세월호에 관한 르포를 읽고 난 후 나는 왜인지 이 경험이 떠올랐다. 언젠가 내 도어락이 멈출 것이 예견된 것처럼, 세월호도 그딴 식으로 운영되다간 사고는 예견된 일인거 같아서. 언젠가 일어날이 4월 16일에 일어났구나. 르포를 읽고 난 나의 소감이었다.
르포를 읽기 전에 나는 일종의 음모론자였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다니, 일부러 그러지 않고서야 이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일부러 사고를 일으켰다거나, 정부와 해경이 일부러 구조를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들에 솔깃했다.선장은 출항 전부터 사고를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는 주장에도 솔깃했다.
그런데 이 르포를 읽고 세월호는 한국사회 자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음을, 부정의와 부조리와 이기주의가 켜켜이 쌓여 이루어낸 참사라는 생각을 할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상규명은 아직 되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의혹은 아직 곳곳에 남아있고, 특조위가 있지만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진실들이 많다. 국정원 개입여부,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전에 취하던 입장, 정말 '음모론스러운 음모'는 아니라는 생각은 확실히 하게 됐다. 이 책은 르포르타주다. 저자는 33차례의 공판을 대다수 방청하며 이를 기록하고 그에 근거하여 최대한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사건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책을 읽으면 입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이 그려진다. 의혹으로 남은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기술했으며 앞으로 진상규명이 될 부분은 밝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전에 취했던 입장의 문제점은 내가 세월호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내 입장은 기사 몇개와 온라인 카페에서 오가는 흥미로운 카더라 통신에 기초해서 내린 간편한 결론이었다.
음모론은 복잡다단한 현실보다 짧은 스토리를 가진다. 사람들이 별 수고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게다가 음모론은 흥미롭기도 하고.) 우리는 어떤 사건을 이해하길 원하지만, 짧은 답으로 이해하길 원한다. 웬만한 자기 일이 아니면 알기 위한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을 대강이라도 이해하는데 내가 최소한 책 1권이 필요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어떤 사건을 어느 정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는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선박 규정을 비롯해 사건의 분단위 경과, 구조정과 해경의 통신 내용, 선박의 복원성이란 무엇인지, 그 배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배는 어떤 과정을 거쳐 출항명령이 떨어지는지, 세월호는 얼마나 낡은 배였는지, 청해진 해운과 하청업체들의 관계는 어땠는지, 청해진 해운은 선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어떻게 갑질을 해왔는지, 그들은 왜 과적을 일삼았었는지, 고박작업(화물을 싣는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등. 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안개 속에서나마 보이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명획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과적을 문제 삼는다. 많은 대중들은 거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심하게 과적했다는 걸 알고 놀랐고(1000톤이상 과적했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온갖 규정을 어기면서도 배가 출항할 수 있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것이 정말 충격적인 것일까. 무수한 관행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우리에게 정말 낯선 모습일까.
청해진 해운이 공무원 향응접대비에만 한해 6000만원을 쓰고 안전교육에 54만원을 쓴 것이 정말 낯선 모습일까. 청해진 해운이 하청업체에게 규정을 어기면서 화물을 실으라고 강요할 때 하청업체가 꼼짝없이 말을 들어야 하는 풍경이 정말 낯선 모습일까. 심지어 직원이 출항 전 점검을 엄격히 하자 승무원과 승객들이 "너희 때문에 배가 지연된다" 며 항의해서 다시 점검이 형식화되었다는데, 이런 모습이 정말 낯선 모습인가.
저자는 묻는다.
저러한 기업간부, 직원, 승객의 모습이 과연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인가? 그들은 여전히 유능한 간부, 현명한 직원, 실용적인 시민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미 전부터 세월호에 탄 학생들에게 자기 일이 아닌 일에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쳐 오지 않았던가.
대중들에겐 선장과 선원들이 가장 악마화되었지만, 책을 읽고 더 분노가 느껴지는 대상은 청해진 해운 일가였다. 물론 직원들은 회사의 과적요구에 반항해야 했고, 사고가 났을 때 구출 의무를 다하고자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됐다. 권력과 돈이 있는 청해진 해운은 뒤로 숨었고, 책임의 화살은 먹고 살려면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말단에게 쏠렸고, 그 희생은 시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이 익숙한 풍경.
아래는 저자의 책에서 발췌한 것을 그대로 옮긴다.
어쩌면 이 사고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세월호 사고를 낳은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여긴 바로 그 국가, 그 사회 시스템이란 사실이다.
조금 우회해서 설명하자면, 이는 내가 세간의 의혹처럼 이 참사를 어떤 음모나 기획으로 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상식을 초월하는 이 사고에는 당연히 상식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일격'이 있을 것 같지만, 나는 재판과정을 통해 참사의 배경에 있는 것은 촘촘하게 결합된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하고 무능한 행동들이란 사실을 알았다.
애초 낡은 배가 도입되도록 이명박 정부가 선령 규제를 완하한 것도 문제이지만, 청해진 해운이 무리한 증개축을 하지 않았다면 이배는 지금처럼 위험한 배가 되지 않았다. 무리한 증개축에 한국선급이 제동을 걸었더라면, 적어도 중개축 이후 한국선급이 승인한 화물 적재 기준에 따라 화물을 실었다면, 위험한 출항을 거부할 수 있도록 선원들에게 발언권이 있었거나 그들에게 용기가 좀 더 있었더라면, 운항 관리자가 규정대로 출항을 규제했더라면, 조타수가 대각도 조타를 했더라도 복원성이 그 정도로 악화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평형수가 좀 더 채워지고 화물이 단단히 고박되었다면), 배는 쓰러지지 않았다.
설령 배가 쓰러졌다 해도 선원들이 평소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아 비상사태에 현명히 대처했더라면, 비상 시 선내 방송 매뉴얼이 갖춰져 있었다면, 진도 VTS가 퇴선 결정의 책임을 세월호에 맡길 게 아니라 과감하게 지시했더라면, 구조 세력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협력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출동한 123정 해경이 더 적극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났더라면......
이 많은 였다면이 결합되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적어도 참사가 되지는 않았다.
요컨대 이렇게 무수한 요인의 동시다발적 진행을 '소수의 일탈'로 볼 수 없다. 진실은, 우리 사회가 이런 행동들을 묵인했거나 심하면 대세로 보아 부추겼으며 그 위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있다. 지붕이 무너진 것은 마지막에 떨어진 눈송이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호를 기록하다 중-
그렇다. 지붕이 무너진 것이 마지막 눈송이 때문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세월호 6주기 추모에서 "코로나 19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와 대책 속에는 세월호의 교훈이 담겨있다"며 "사회적 책임을 유산으로 남겨준 아이들을 기억하며 국민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을 이제야 깊이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