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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y 15. 2020

일본인 여성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안부하면 떠오르는 나의 첫 기억은 이승연이 위안부 누드를 찍어 국민적 욕을 얻어먹었던 사건이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를 배울 만큼 배운 고등학생이었지만 위안부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다. 그저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것, 그때 소녀들을 끌고 가 위안부를 삼았다는 것,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를 알았다.

     

감정도 단순했다. 나쁜 일본, 불쌍한 할머니,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그걸로도 일본을 욕하기엔 충분했다. 우리나라와 민족을 모욕한 여배우를 욕할 자격은 충분했다. 대중들의 분노에 나도 숟가락을 얹었다. (그마저도 딱히 열정은 없었지만) 진지한 관심과 감정도 아니면서 분노와 연민을 표현한 위선이 지금에야 부끄럽다.

    

그리고 위안부에 관련된 기사들이 가끔씩 메인에 뜨곤 했다. 얼마 전에는 기부금 사용에 대한 내용으로 또다시 위안부라는 단어를 접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욕하고 잠시 안타까웠다가 몇 시간이면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우리는 원래 다 그러니까.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잊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잊거나 잊지 않거나는 다짐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도저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위안부에 대한 기억은 정희진의 책(페미니즘의 도전)에서였다. 위안부 누드를 찍은 사건에 대한 그녀의 해석에 나는 신선함을 느꼈다. 위안부 누드는 포르노의 공식을 정확히 따른 작품이라는 것이다. 제작진은 그런 국민적 비난을 받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녀의 의견은 다소 충격이었다.

     

포르노의 핵심은 ‘얼마나 벗었는가’, ‘얼마나 야한가’가 아니라 두 대상의 권력 차이라고 한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포르노의 주 고객층은 쾌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침략국의 남성, 식민국의 여성은 권력 차이가 따따블이 된 것이니 사실 포르노의 공식을 정말 잘 준수했을 뿐이라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그런데 이 분석은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N번방 사건은 이 공식이 정말로 사실임을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조주빈 일당과 돈을 내고서라도 그 방에 참여했던 남성들이 얻은 쾌락이 야한 데서 왔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한 것은 널리고 널렸다. 그들이 쾌락을 느낀 것은 이 권력 차이에서였다.

      

그리고 이것이 포르노의 기본 공식이다. 물론 N번방 일당은 극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쾌락을 느끼려 해서 범죄가 되었지만 포르노의 기본 공식이 권력의 차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당시 포르노를 즐겨 보던 수많은 남성들은 왜 위안부 누드 사건에 대해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을까? 제작진 입장에서 정말 비난을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쾌락 공식에 따라 권력 차이를 2배 늘렸는데 이렇게 욕을 먹다니..... 과연 민족은 젠더를 뛰어넘을만한 범주인 것인가?

   

드디어 이 책의 주제가 나왔다. 민족인가 젠더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페미니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하다.”의 저자 우에노 지즈코가 쓴 책이다. 일본인(가해국) 여성 페미니스트가 바라보는 위안부 역사는 어떤 것일까. 그녀는 위안부 문제가 페미니스트로서, 또 가해 국민으로서, 특히 가해국의 여성으로서 여러 지점에서 부딪히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민족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래서 일본인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의 논의를 펼치지도 않는다. 일본 여성인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무 관심도 없었으면서 때때로 뜬 기사 하나 보고는 연민하고 분노하고 곧바로 잊어버리는 나 같은 사람보다 저자가 훨씬 더 진심으로 할머니들을 생각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단지 한국인이기 때문에 나는 분노하고 안타까움을 표할 자격이 있고, 일본인이라고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은 정말 아니다.

    

위안부는 한국인 일본인 모두에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50년 동안 침묵하다가, 전후 반세기가 지나고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50년간의 침묵에 한국과 한국인은 책임이 없을까. 피해자가 치욕으로 숨어 지내야 했던 세월에 한국의 가부장은 공범이다.

 

민족의 치욕을 왜 떠벌리느냐, 너의 자발성도 있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성립되는 패러다임 하에서 약자는 절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은 무려 50년 동안 이런 패러다임 하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침묵시켰다. 이는 성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에게 하는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래서 지즈코는 말한다. 피해자들에게 반세기 넘게 침묵을 강요한 죄, 이것이 위안부가 과거의 범죄가 아니라 현재의 가해인 이유라고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국주의 전쟁 체제 하에서 주변화된 여성에게 “조국이란 없다. 나는 여성으로서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항변하며 대부분의 역사를 통해 조국은 나를 노예처럼 다루 왔다고 말했다.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국가는 어떻게 해 왔는가?

     

위안부 문제는 이 세계에서 여성의 위치를, 국민국가에서 여성의 위치를 명백히 보여주는 역사다.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도, 사과하지 않는 것도, 국가 간 합의했으므로 끝났다고 여기는 것도 국가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식민지 시대 약자였던 한민족 내에서도 이류 국민이자 이등시민, 타자였던 여성에게 한민족의 이름으로 가해를 행한 한국의 가부장 사회, 그를 구성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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