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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r 25. 2020

<페스트: 알베르 카뮈> 내 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인간의 이유

 얼마 전 tvn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소개되었습니다.     

페스트는 페스트 균 감염에 의하여 일어나는 급성 감염병입니다. 흑사병으로 잘 알려는 이 전염병은 당시 유럽 인구를 1/5로 줄일 만큼 아주 무서운 병이었지요. 대규모의 인구 손실은 유럽의 경제기반을 흔들었고, 사회분위기 또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미신에 빠지게 하고, 불신하게 만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지금 전 세계가 맞닥뜨린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는 혼란에 빠져 있으니까요. 방송에서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함께 이 문제를 이겨내야 할 것인가, 우리가 가져야 할 시민의식과 태도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이 책과 가까울 때 우리의 이해는 아무래도 넓어질 것입니다.


저는 불과 몇 주 전에, 길거리의 풍경이 마치 SF소설이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 농협 앞에 늘어선 긴 줄을 보고 말이죠.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마스크 구입을 위한 대기 줄인 것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보니 익숙해서 특별할 것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전히 기이한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장면을 그로테스크한 문체로 소설 속에 그렸다면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만하지 않나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느낌으로 뛰어난 소설가가 상황을 묘사한다면, 우리는 지금 내 현실이 그렇게 흠칫하게 묘사될 수 있는 것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는 마스크를 잃어버려 어제 법원에 가지 못했다. 공공기관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디어 내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이다. 주민번호 끝자리가 6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면서 는 금요일에만 마스크를 살 수 있다.     


몇 년 전에 이런 묘사를 읽었으면 상당히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까요? 재현된 현실에선 기괴하게 보이는 일도 (책이나 영화의 장면 묘사). 진짜 현실이 되면 금방 받아들이는 게 사람인가 봅니다. 전혀 이상하거나 기괴하다는 느낌도 없이 말이죠. 그러나 재현을 통해서만 현실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정희진의 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책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서 나와 타인,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 오랑 시입니다. 피를 토하는 쥐, 그러다 피를 토하는 사람들. 두려움이 앞선 오랑 시 공무원들의 무책임한 대처, 결국 폐쇄된 도시.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그런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카뮈는 이 책을 70년 전에 썼지만 마치 2020년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합니다. 이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들, 다른 이익을 취해보려는 사람들, 넘쳐나는 혐오와 불신이 1940년의 오랑시와 겹쳐집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이루어지는 응원과 연대 그렇습니다.


이날 출연한 게스트 신경 인류학자 박한선 박사는 ‘이 책이 감염병에 대한 대중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밝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감염병을 향한 대중의 반응은 3단계를 거친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1단계 불안: 내가 감염되지 않았을까?

2단계: 혐오: 감염되거나 감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

3단계: 희생자 찾기: 감염병에 대해서 탓할 누군가가 필요함.     


박한선 박사도 이 반응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죠.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인간은 페스트가 유행했던 700년 전이나, 이 책이 쓰여졌던 70년 전이나 비슷한가 봅니다.     


사람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과거의 선조들보다 합리적이며 시민의식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혐오와 희생양 찾기는 ‘스마트폰 전 국민 시대’를 맞아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저는 죽은 사람 앞에서 죽을만하다, 잘 죽었다고 하는 댓글을 보고, 놀람을 넘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당성 있는 혐오란 대체 무엇일까요.


아주 초반에 햐 확진자가 역학조사 결과 여기저기 돌아다닌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몇몇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며 합리적인 체, 시민의식이 있는 체를 했는데, 정말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시민의식이 있는 사람이 달만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놓고 불륜이냐, 맨날 노래방에 가는 걸 보니 직업을 알만하다는 등의 공격도 있었지요.

사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누구도 그 정도로 경각심을 느끼고 조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대규모 집단감염이 있기 전에는 학교도, 학원도, 가게도, 우리들의 일상도 조심은 하면서 그대로 하고 있었거든요.  


박한선 박사는 “감염자들은 비난하는 게 아니라 지지하고 격려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야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밝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의 사태를 조금이라도 빨리,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태도가 아닐까요. 혐오는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병을 이기기 위해서도,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책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연대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영웅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의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타루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
ㅡ타루ㅡ

  

내가 가진 페스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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